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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은 하나의 시체에 대한 세 사람의 진술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한 사람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도둑, 나머지 두 사람은 아내와 죽은 남편의 혼령. 기이한 것은 이들 셋이 모두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도 이 셋의 진술대로 사건을 재현할 뿐, 어떤 것이 진실인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손쉬운 잣대는 “객관적 사실은 없다.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던 니체를 따르는 것이다. 사실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원근법에 의해 사실을 재구성하고 때론 왜곡한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것을 사실로 믿게 되었는가’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자기합리화’라고만 할 수 없는 복잡한 욕망과 무의식의 기제가 작동한다.

대선 토론을 보면서 곳곳에 놓인 ‘덤불 속’을 발견한다. 그제 3차 토론에서 있었던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한 공방은 마치 사오정 개그를 연상하게 한다. ‘물어봤습니까’ ‘아닙니다’ ‘물어봤다지 않습니까’ ‘진실이 아닙니다’라는 되풀이는 ‘팔계야 어디가’에 ‘목욕탕’이라고 거듭 답하는 저팔계의 말을 무시하고, ‘아~ 난 또 목욕탕 가는 줄 알고’라고 답하는 사오정의 판박이다. 합리적 보수로 자처하는 이성에도 강고한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가짜 뉴스가 판치고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지금, 매스컴과 후보들의 사실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저마다의 무의식적 욕망을 담은 ‘선택된 사실’이자 ‘왜곡된 사실’일 경우가 많다. 누구도, 어떤 사실도 그런 욕망과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욕망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 토론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후보자들의 응답보다 질문이다. 흔히 응답자가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답변자는 질문자가 깔아놓은 물음이라는 매트릭스와 프레임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의 자유는 제한된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일단 법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피의자’와 같이 경계를 넘나드는 대담한 분은 더 큰 판에서 활약해야 한다. 둘째, 어른이어야 한다. 어른은 스스로를 통제하고 책임지는 주인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물어보고, 거기에 반항하거나 반응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은 어른이 아니다. 또한 어른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이다.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남에게 묻고 확인받으려는 자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그리고 어른은 삐지거나 토라지지 않는다. 정직하게 타인의 잘못에 대해 질책할 수는 있지만, 얼굴을 보지 않는 등의 유치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른은 모욕과 비난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비난에 대해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아휴, 실망입니다’와 같은 투정은, 더 큰 수난을 감내해야 하는 지도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멘탈이다.

그렇게 해서 남은 어른 중에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덕목을 갖춰야 한다. 첫째,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소통(communicate)은 함께(com) 나누는(municate) 것이다. 질문을 했으나 자신의 질문에만 사로잡혀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둘째, 자신의 철학과 언어가 있어야 한다. 참모의 말, 소셜미디어에 부유하는 말로 무장한 후보는 자신의 철학과 언어가 없는 자이다. 즉, 지도자의 언어는 그 사람과 밀착되어야 하지, 과거 지도자처럼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셋째, 곤혹과 딜레마를 알아야 한다. 정의실현과 정책을 교과서 같은 진공 상태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현실의 실타래 속에 놓고 볼 줄 알아야 한다. 쉽게 타인을 타매하고 배제하고 명쾌한 답을 내는 것은 쉽지만, 그것은 바깥에 있거나 상황 속에 있지 않을 경우이기 쉽다. 넷째, 지도자의 대타자, 즉 그가 눈치 보아야 하는 대상은 국민이어야 하지 어떤 특정인이거나 권력이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지도자는 그가 이끄는 국민들을 모두 다 데리고 가야겠다는 원대한, 불가능한 꿈을 꾸는 자여야 한다. ‘그 모두’를 데리고 가는 일이 아무리 끔찍하고 힘들더라도, 최대한 설득하고 달래고 위협하고 혼내서라도 함께 가야지 버리고 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두에는 ‘청년, 노인, 여자, 노동자, 재벌, 동성애자, 장애인’ 등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이웃인 ‘북한, 미국, 중국과 세계’까지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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