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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노동계 블랙리스트

opinionX 2017. 4. 20. 11:14

지난 11일부터 울산 동구 고가다리 교각에서 전영수씨(42)와 이성호씨(47)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지난달 업체가 폐업한 이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같이 실직했으나 아직도 일을 찾지 못한 4명 모두 노조 조합원이다.

사실 이들의 삶은 실직 이전부터 불안정했다. 하청노동자로 조선업에서 일하면서 업체의 잦은 폐업, 짧은 계약기간, 높지 않은 임금 등으로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해왔기 때문이다. 한국 조선업은 2000년대까지도 세계 최고 수준의 수주실적을 자랑하며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칭찬받았다. 그런데 조선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좋지 않다. 한국 조선업 생산직 열 명 중 아홉 명은 사내하청 인력이다. 원청업체는 하청업체와 단기계약을 맺는데, 하청은 주어진 물량을 기한 내에 생산해내지 못하면 원청으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원천적으로 의존적 관계에 있는 하청업체들은 낮은 비용으로도 물량을 맞추기 위해 다시 물량팀과 하청 계약을 한다. 이렇게 하청, 하청의 재하청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수많은 하청노동자들은 전체 한국 조선업 종사자의 80%나 된다. 한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어진 다단계식 고용구조 속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가장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가장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다. 2014년 현대중공업에서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 9명 전원, 2015년 산재 사망자 3명 전원, 그리고 2016년 산재 사망자 11명 중 7명이 하청노동자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하청노동이 조선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업종을 망라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시장에서는 지금 이러한 하청구조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몇 달치 임금이 체불되고 쉽게 해고되어도 다음날이면 다시 똑같이 나쁜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주요 제조업 분야만 하더라도 하청노동자의 수가 절반을 훌쩍 넘는데 왜 함께 연대하여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을까. 나는 연구차 여러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자연스레 노동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노조에 가입했더니 찍혀서 취업이 안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갈까봐 노조 가입을 못하겠다’ ‘조합원이 있는 하청업체는 원청이 아예 통째로 날려버린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논의는 사실 오래되었다. 본격화된 계기는 1970년대의 동일방직 노조투쟁이었다. 대부분의 종사자가 여성이었던 이 회사가 노조 파괴를 시도하자 여성 노조원들이 옷을 모두 벗고 뭉쳤다. 이에 경찰은 가차 없이 곤봉으로 구타하면서 전원 연행했다. 1978년 사측은 또다시 노조 무력화를 시도했다. 여성 노조원들이 이에 저항하자 사측은 남성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똥물을 뿌렸다. ‘동일방직 인분사건’이다. 그런데 보다 심각한 것은 당시 작성되었던 블랙리스트다. 각 사업장에 배포된 블랙리스트로 인해 해고 노동자들은 이후 재취업까지 완전 봉쇄되었다. 이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노조 출신 노동자의 해고 사태가 속출하면서 노동계 블랙리스트는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부산 금호상사 전산실에서 전국의 해고 노동자를 비롯하여 노조 조합원이 포함된 8000여명의 명단이 입력된 블랙리스트가 발견됐다. 2014년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지만, 2011년 동일방직 피해노동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서 당시 국가 정보기관과 기업인 친목단체가 만든 블랙리스트가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은 복지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기 때문에 일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그야말로 벼랑 끝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노동계 블랙리스트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 3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일할 기회마저 박탈하여 생존권까지 위협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역사상 최초로 현직 장관까지 구속시켰다. 그런데 노동자에게 족쇄를 채우는 노동계 블랙리스트는 이렇게 수십년 계속되는데도 우리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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