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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여혐을 팝니다”

opinionX 2017. 4. 18. 10:37

예능이 남자들 판이라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규라인, 유라인, 강라인이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여자 예능인은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이렇게 남자판인 예능, 즉 한남 엔터테인먼트는 <남원상사>에서 그 완성을 본 것 같다.

그간 한국 예능은 경제적 몰락 속에서 기가 꺾인 남자들을 위로하는 재현 전략을 취해왔다. 예컨대 지난 10년간 대표 예능이었던 <무한도전>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남자’들이 모여서 어떻게 ‘무모한 도전’을 하는가를 보여주던 콘셉트에서, 점차로 지치고 힘든 국민정서에 말을 거는 거대 프로젝트에 대한 ‘무한한 도전’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고난 끝에 기어코 성공하고야마는 루저의 성공담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무한도전>을 급부상시켰던 에피소드가 스포츠 댄스, 조정, 봅슬레이, 프로레슬링처럼 스포츠를 주제로 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그 서사의 축적 속에서 출연자들 역시 ‘고군분투 속에 성공한 가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남자 루저들의 우정과 성장, 그렇게 쓰여진 성공담. 그것이 <무한도전>의 인기비결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2017년 대한민국. 여기는 프로젝트의 성공과 가장의 탄생이라는 판타지조차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헬조선이다. 덕분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내 인생 유일한 즐거움을 망치는 아내에 대한 성토(<수방사>)와 아재짓의 향연(<아는 형님>)을 지나, 남자들이 술마시고 ‘노가리 까는’ 것(<인생술집>)까지 방송을 탄다. 그리고 드디어 대놓고 “남자의 원기가 떨어진 것은 여자 탓”이라고 악다구니를 치는 예능이 등장했다. <남원상사>다. 이건 정말 최악이다.

<남원상사> 1회는 “남자의 주차 부심”에서 시작해서, “남자들이 고추 긁는 이야기”로 넘어가더니, 마지막 대미는 “프러포즈 안 했다고 바가지 긁는 와이프에게 확실히 프러포즈 해주기”로 장식되었다. 그렇게 “남자들의 로망, 우리가 책임집니다”라고 외치며 방송은 끝난다.

프러포즈에 대한 묘사도 가관이다. 몰래카메라인지 모르고 레스토랑에 남편과 함께 들어온 아내는 계속해서 셀카를 찍어댄다. 그러고는 “우리 이사가면 인테리어를 클래식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남편은 “돈이 얼만지 아냐?”라고 되묻고, 진행자인 장동민이 그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렇죠, 남자들은 현실적인 생각을 하죠.” <남원상사>가 여자와 남자를 그리는 프레임은 분명하다.

그 프레임 안에서 프러포즈 받는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 역시 ‘남자가 상상하는 여자의 생각’을 반영하면서 자막으로 박제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식사 도중 다른 커플의 공개 프러포즈가 각본대로 진행된다. 남편이 아내에게 “부러워?”라고 묻자 아내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부럽지 않은 척”이라는 자막이 뜬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충실한 대역 배우가 될 뿐이다. 예쁘고, ‘관종’이고, 보호받길 좋아하는 ‘전형적인 여자’로서, 그는 프러포즈를 받고 ‘행복의 눈물’을 흘린다. 그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떤 개성을 가진 사람이건, 그를 그리는 프레임은 이미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이 ‘김치녀 서사’에 반전이란 없다.

<남원상사>는 남자를 좌절시키는 원인으로 여자, 그리고 그들의 ‘여자짓’을 지목한다. 여기서 ‘여자짓’이란 여성이라는 성별에 덧씌워져 있는 이 사회의 전형(stereotype)을 의미한다. 이 확증편향 안에서 여자는 김치녀 프레임에 포획돼 벗어날 수 없다.

대중문화가 지친 남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 위로를 다른 이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제공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은 ‘여성혐오가 팔리는 시장’일 뿐이다.

여혐을 자기 상품성으로 삼는 예능과 남성 셀렙, 그리고 셀렙-워너비가 늘고 있다. 특히 <남원상사>와 같은 남성용 예능은 그런 시장을 발굴하고 확대시킨다. 그 세계에서 여혐 발언은 실수가 아니라 적극적인 생존전략이 된다. 그 공동체는 혐오를 제재하지 않고 오히려 권한다. 이 지긋지긋한 한남 엔터테인먼트의 끝장을 보고 싶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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