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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고향인 서울 망원동으로 돌아왔다. 모 선생님께서 글을 쓰기 위한 공동 공간의 한 자리를 흔쾌히 내주신 덕분이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순대를 사 먹던 그 거리는 이제 ‘망리단길’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망원동과 경리단길의 합성어라고 한다. 간판만 보아서는 무엇을 파는지 잘 알 수 없는 세련된 가게들이 많이 생겼고 물가도 많이 올랐다. 그렇게 많은 것이 변했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겹다. 눈길 닿는 자리마다 묻은 지 30년은 되었을 법한 추억들이 여전하다.

낮에는 허락받은 작업실에서 글을 쓰다가 저녁에 콜이 들어오면 대리운전을 하는, 그런 생활을 한동안 지속했다. 새벽에 일을 끝내고 돌아와 알람 소리를 못 듣고 누군가의 출근하는 소리에 깨기도 여러 번이었다. 정말이지 몇 달 동안은 거기에서 먹고 자는 민폐를 끼쳤다. <대리사회>라는 글은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망원동에서 대리운전을 시작하면 일산이나 파주로 많이 가게 된다. 광명이나 안양, 아니면 남양주로도 간다. 다양한 지역의 콜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양화대교를 기점으로 여러 도로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도로라고는 강변북로밖에 모르던 나는 곧 자유로, 내부순환로, 외곽순환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와 같은 주요 도로들을 외우게 되었다. 경기도의 외곽, 그 어느 경계지역까지 가고 나면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수목원이나 화장터 근처에 홀로 남기도 했다. 운 좋게 같은 처지의 대리기사 선배들을 만나면 함께 농협 사거리로 내려와 어떻게든 서울로 돌아왔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광역버스 막차의 손님은 주로 대리기사들이었다. 물론 기다리다가 서울로 가는 콜을 잡을 수 있다면 복귀도 하고 돈도 벌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행운은 거의 따르지 않는다. 늦은 밤, 서울에서는 직장인과 학생들이 경기도로 빠져나가기 위해 입석을 마다하지 않는 그 시간에, 경기도에서는 대리기사들이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광역버스가 서는 정류장을 서성거린다. 서울로 복귀하면 경기도로 가는 콜이 핸드폰 화면을 채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기껏 돌아온 그곳으로 다시 가는 수밖에 없다. 대리기사들은 새벽의 서울이 사람을 뱉어낼 뿐 쉽게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망원동으로 돌아왔지만,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은 이제 없다. 서울이 그들을 뱉어냈다고 하는 편이 더욱 어울릴 것이다. 서른이 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어느 인생의 변화를 겪으면서 각지로 흩어졌다. 서울의 북쪽 끝인 수유나 미아로 간 친구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고 역곡으로, 동탄으로, 원흥으로, 김포로, 저마다 이름도 생소한 도시로 갔다. 광역버스나 급행전철의 노선을 따라 ‘이주’한 것이다. 아이가 크면 조금 더 멀어져야 할지 모른다. 망원동 근처의 대학/대학원을 다니는 이들도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을, 아니면 500만원에 60만원을 마련하기가 힘들어 대학가와 오히려 멀어진다. 그러고서도 변기와 침대가 거의 맞닿아 있는 비좁은 공간에서 견뎌낸다. 보증금을 적게 요구하는 곳을 찾아가 보면 대개는 이런 데서도 사람이 사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망원동/서울은 더 이상 젊은 세대가 자신의 노동이나 신용으로 거주에 필요한 초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대학생이 단칸방을 얻는 데도 1년치 월세가 훌쩍 넘는 보증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뿐 아니라 대학이, 직장이, 삶을 지탱하는 그 무엇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모두가 안간힘을 쓰며 버텨낸다. 초등학교 동창 한 명이 결혼하고도 망원동에 남았는데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내가 자란 망원동이 정말로 좋아, 여기에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계속 살고 싶어, 지금은 그게 유일한 목표야.” 그에게 다른 도시로의 이주는 밀려나는 일이 될 것이다.

망원동/서울이 언제 다시 나를 뱉어낼지 알 수 없다. 허락받은 작은 공간이 있어 잠시 머물고 있을 뿐 완전한 이주를 꿈꾸기는 어렵다. 다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조금 더 버텨내고 싶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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