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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을 돌 때, 한 폭 끊어 액자로 걸어두고 싶은 풍경 하나가 있었다. 호젓한 길은 길게 이어지고 굽어지며 휘돌아 넘어간다. 길에는 많은 것이 있다. 누가 보낸 풀들이기에 이리도 정교한가. 각자 제자리를 독실하게 지키고 있는 고유명사들, 아직 공부가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꽃동무들한테 귀동냥 한번 하는 것도 어디인가. 은밀하고 미세한 것들이 마음의 한바탕을 휘젓고 간다.

저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들로 휘황한 이 광경에도 무시무시한 일은 벌어지고 있다. 산초나무 가지의 거미줄엔 바람을 따라가다 덜컥 걸려든 나비의 흔적만 남았다. 길섶에서 기웃거리는 기름새 줄기마다 끈적한 기름기가 흥건하다. 벼과의 이 상냥한 풀이 식충식물일 리야 없겠지만 모기 뒷다리보다 작은 곤충들이 애꿎게 걸려들었구나.

이런 사정쯤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숲 그늘에 퍽 기이한 물체가 서 있으니 둘레길 코스의 어느 쉼터에서 내건 광고판이었다. 알록달록한 글씨는 사람들의 허기와 호주머니를 노리는 메뉴판이다. “맛있는 나물보리비빔밥/피자 같은 파전/톡! 쏘는 홍어회/새콤달콤 홍어회무침/도토리묵/주물럭/비빔국수/잔치국수.”

성과 속이 어우러진 듯한 길은 통과하는 것들로 분주하다. 그 먼길을 향하는 발길이 나를 앞지를 때, 억새 잎에서 바디나물 대궁으로 훌쩍 뛰어오르는 곤충처럼 <논어>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볼까. 몇 해 전 올해의 사자성어로 임중도원(任重道遠·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다)이 선정되었다. 이 말은 이어지는 대목이 더 있으니 사이후이(死而後已)다. 죽고 난 뒤에 그 짐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무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듬직하게 위안도 되는 말이 아닌가.

길바닥에는 소나무 뿌리가 행인의 발길을 노리며 드러나 있고 여기서부터 운봉, 인월로 이어진다. 멀리 오늘의 길을 가늠하면서 우물쭈물하는데 동무들은 벌써 행방을 감추었다. 부리나케 뒤쫓아 모퉁이를 휘돌아가니 무덤 한 기가 햇빛 한 상을 푸짐하게 받고 있었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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