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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을 상상한다. 자주 불편해지는 몸 때문에 가뜩이나 없는 돈이 들숨 날숨마다 빠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낼 의욕도 감각도 아이디어도 바닥난 지 오래고, 친구들과 마주 보고 웃고 떠드는 즐거움보다 찌푸린 얼굴로 독백하는 외로움으로 채워지는 미래를 떠올리다 보면, 노인 건물주들이 못 견디게 부러워진다.

큰 건물도 안 바란다. 2~3층짜리 작은 건물 제일 위층에 실거주하고, 다른 공간에는 세입자를 받아 임대료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취미 생활과 몸을 돌보는 여력을 가지는 노년이면 더 바랄 것 있을까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나는 아마 안될 거야. ‘재테크’는커녕 하루하루 생존으로 버거운 사람들이 대다수인 21세기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던 상상이나 마저 해보자. 내가 만약 건물주라면 물가상승률 이상의 월세 인상 따위 하지 않고, 입금을 확인할 때마다 세입자 있는 방향으로 절할 거다.

그저 내게 남는 공간을 빌려줬을 뿐인데, 그곳에서 ‘열일’하며 건물주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든든한 존재라니! 그뿐인가? 세입자의 감각적인 아이디어와 자본을 투여한 인테리어와 근면한 노동으로 불러들인 소비자들은 건물과 거리의 가치를 높인다.

그러나 많은 건물주들은 세입자 고마운 줄 모른다. 세입자들이 자신들이 높인 가치 때문에 있던 곳에서 쫓겨나는 역설에 직면하는 이유다. 물론 어떤 건물주들은 과도하고 급격한 임대료 상승을 자제하며 공생을 도모하기도 하지만(그런 동네는 풍경만 봐도 정겹다), 너무 드문 일이라서 문제다. 대부분의 건물주는 내게 성악설을 믿게 한다.

가장 악질적인 건물주는 세입자 내쫓는 것을 목적으로 임대료를 대폭 올려, 쫓겨나는 세입자가 그나마 다른 곳에 새로이 정착할 수 있게끔 돕는 권리금마저 약탈하는 유형이다. 서촌 궁중족발의 건물주가 대표적이다. 그는 297만원이었던 월세를 1200만 원으로, 3000만원이었던 보증금을 1억원으로 올렸는데, 임대료 상승률이 급격했다는 점도 문제지만 이것이 동네의 평균 시세를 훨씬 웃돌았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임대료 책정은 다음 세입자가 들어오는 일을 요원하게 하고, 다음 세입자를 구하지 못한 상태로 쫓겨나면 권리금은 건물주의 몫으로 흡수된다. 이처럼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혈안이 된 궁중족발의 건물주는 약 2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입자를 강제로 쫓아내기 위해 온갖 폭력을 동원했다. 사장은 용역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내내 불안한 시간을 보냈고, 끝내 용역에 의해 끌려나오며 네 손가락이 절단됐다.

건물주는 그것을 보면서도 조롱하며 비웃었다. 그래서 궁중족발 사장이 건물주를 둔기로 폭행한 소식을 접했을 때, ‘그러지는 마시지’라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오죽 억울하면 그랬을까’라는 이해가 교차했다.

이 사건으로 법의 모순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임대차 계약법을 고치자는 외침은 끊임없었지만, 개정안은 좀처럼 통과되지 않았다(건물주 국회의원들이 많아서 그런가?). 이번에야말로 국회는 임차인 보호 기간을 10년 이상으로 장기화하고, 환산보증금의 상한선을 폐지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끼리의 공생을 북돋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사회안전망이 좀 더 튼튼해진다면 우리는 생존에 허덕이고 노년을 걱정하며 쫓기듯이 살지 않을 것이고, 무리해서 노후 대비용 부동산을 매입한 뒤 세입자의 고혈을 짜내어 부채를 갚는 행태도 드물어질 것이다.

그러나 개정안이 통과된다 해도 이전의 법 때문에 고통받은 이들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궁중족발 사장이 둔기로 가한 폭력과 건물주가 오랜 기간 누적한 폭력을 각각 저울의 양쪽에 매달면, 나는 저울이 후자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궁중족발 건물주는 법이 자기편이라 믿었기에 당당하게 폭력을 행사했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며 비웃었다. 그동안 상가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던 국회의원들이, 권력자들이 양심이 있다면, 책임감을 느낀다면 부디, 잘못된 법의 피해자의 고통과 불행을 경감시키는 데 힘을 보태길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님도 탄원서 써주시면 정말 좋을 텐데….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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