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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유미의 세포들>의 주인공 김유미는 작가 지망생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공모전에 당선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기대했던 문학상에서 다시 낙방하고 결국 그는 스스로에게 아픈 말을 꺼내고 만다. “너 재능 없다고, 인정? 어… 인정.” 그렇게 자신을 규정하고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유미도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아이고 우리 딸 이제 정신차렸구나, 그래 해보고 싶은 거 한 번 해봤으면 됐다. 유미야, 지금 네 나이를 생각해 봐라, 남들은 지금 다 돈 모아서…”하고 문자를 보낸다. 유미는 남자친구에게도 만나면 알려줄 소식이 있다고 전화를 한다. 회사에 복직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유미가 되기보다는, 유미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 내가 될 것인가를 먼저 상상해보아야 한다. 정신을 차렸다고 기뻐하는 나일지, 열정과 끈기가 없음을 비난하는 나일지, 괜찮다고 안아주는 나일지, 저마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곁에는 유미를 닮은 소중한 이들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이동건 작가의 네이버웹툰 <유미의 세포들> 한 장면

유미를 보면서 나는 얼마 전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아내를 응원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한 젊은 남자를 떠올렸다. 날마다 지쳐 보이는 아내에게 힘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까지 시간강사였던 나에게 “어떤 말이 가장 힘이 되었는가”를 물었다. 그래서 그간 어떤 응원을 해주셨나요, 하고 되묻자 그는 “힘내, 그래도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라고 말해 주었다고 했다. 내가 “저, 죄송하지만 전혀 응원이 안되었을 것 같아요. 그 말은 저도 정말 많이 들었지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거든요” 하고 웃자, 그도 겸연쩍게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젊은 연구자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이야 이제 대학생들조차도 알아서 연민의 눈빛을 보내는 모양이지만, 사실 가장 힘든 건 그 처우에 따른 생계의 곤란함보다도 다른 데 있다. 나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것일까,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하는 자괴감이다.

나의 경우는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합친 8학기 동안 적어도 10번 이상은 했던 것 같다. 어쩌면 하나의 발제문을 쓸 때마다 10번씩의 후회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마감이 있는 무엇에 제대로 한 줄 보태지도 못하고 하얗게 밤을 지새워 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20대 중반, 그렇게 꾸역꾸역 쓴 발제문을 가지고 수업에 들어갈 때의 민망함, 발제 후 질의 시간에 받게 되는 비판과 격려들, 그래서 후줄근한 마음, 좋아서든 부끄러워서든 마시게 되는 술 한 잔, 그때의 감정들이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내가 쓴 논문을 건네는 것이었다. 별쇄본으로 나온 20여페이지의 볼품없는 그 논문을 내밀고 나면 그래도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어’ 하고 손짓하는 기분이 되곤 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멋져, 힘내, 너는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였다. 친구들은 대다수가 회사원이었고 그들은 자신과 나를 동시에 위로하고 싶어 했다. 가끔은 내가 부럽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응원이나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마음이야 고마운 것이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자괴감이 더욱 커졌다.

그 남자에게 “아내에게서 논문을 선물받은 일이 있으신가요”라고 묻자, 그 역시 몇 번 받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아니어서 그냥 받기만 했다고 덧붙였다.

내가 논문을 건네며 바란 한마디는 사실 명확했다. “논문, 잘 읽었어” 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글이고, 읽는다고 해서 그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칠 만한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 나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그것을, 지도교수와 심사위원과 나, 이렇게 세 사람에 더해 당신 한 사람이 읽어주었으면 해서 건네는 것이다.

유미는 출판사로부터 “이번 공모전에 출품하셨던 작가님의 작품 <내 사랑 뮤즈> 출간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하는 내용의 연락을 받는다. 그의 남자친구 유바비는 그 소식을 듣고 이제 그에 반응하려고 한다. 나는 그가 “축하해 유미야, 나는 너의 글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 계속 너의 글을 읽게 돼서 기뻐. 그리고 책이 나오면 내가 제일 먼저 살게”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유미도, 나도, ‘그’의 아내도,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버텨내고 있는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꼭 듣고 싶은 한마디일 것이다. 힘내라는 말은 사실 공허하다. 대신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그의 삶뿐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해준다. 나도 여전히 그 말이 가장 (듣)고프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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