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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매일 먹는 것이라고는 조밥에 나물 반찬에 지나지 않는다. 몹시 힘들여 별식을 만들어 봐야 뭉텅이로 썬 떡에 형편없이 싱거운 술이다. 귀공자가 이 모습을 보고 비웃는다. ‘이렇게 하찮은 것을 먹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을까?’ 부잣집은 하루 식비로 일천전(錢)을 써 기린을 삶아 죽 끓이고, 용을 썰어 젓갈 담근 듯한 천태만상의 기이하고 야릇한 음식을 밥상에 벌여 놓는다. 시골에서 글깨나 읽은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 탄식한다. ‘저렇게 사치를 부리니 어찌 망하지 않을까?’”

조선 문인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 쓴 <제향루집서후(題香樓集敍後)> 속 한 구절이다. 아주 정통적이고 고답적인 글쓰기와 보다 가벼운 글쓰기 사이의 차이, 그 둘의 엇갈림에 관한 맥락에 놓인 구절이지만 ‘컵밥’과 ‘파인다이닝’이 엇갈리는 시대에 굳이 다시 읽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글쓴이는 실로 잘 먹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잘 먹고 산 사람이다. 소고기라면 구이·전골·산적·육포·장조림 등 갖가지로 해 먹어치웠다. 구이용기는 벽장에 따로 보관했다. 돼지고기에 대해서는 라드를 입속에 녹여 먹는 한편 비계를 저며 불에 구워 먹는 섬세한 미각을 발휘했다.

수산물로는 철철이 잉어·청어·전복·복어·도미·게장·어리굴젓을 즐겼다. 쑥국, 미나리강회도 즐겼고 보기 드문 차 애호가였다. 수박·참외·대추·밤·배·감 또한 제철을 놓치는 법 없이 되들이로 먹어치웠다.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심노숭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감에 미친 바보(枾癡)’다. 쉰 살 넘어서도 감 60~70개를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미식가답게 김치 취향도 남달랐다. 서울의 음력 2월 미나리소 김치는 꿩고기보다 양고기보다 맛나다고 했고, 여기다 청포묵이며 탕평채를 곁들일 줄도 알았다. 이 김치는 거위알보다 흰 일등급 분원 사기에 내야 했다. 그의 음식 기호, 취향에 대한 고백은 메밀국수 앞에서도 번뜩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메밀국수이다. 메밀국수를 품평하면 평안도 지방 것이 최고이고 차게 조리한 것이 더욱 좋다. (중략) 며칠 사이에 한 번이라도 먹지 못하면 마음이 즐겁지가 않다.”

그가 남긴 식료의 목록, 음식의 이름, 조리 방식, 관능과 미각의 표현은 오늘날의 음식 글쓰기에 견주어 빠지는 데가 없다. 오늘날 통념의 평균이 모여 있는 위키피디아 영어판에 따르면 ‘음식 글쓰기(food writing)’란 넓은 뜻에서든 좁은 뜻에서든, 음식이라는 글감에 집중해서 쓴 글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음식평론가적인 작업과 음식 역사가의 작업 둘 다가 포함된다. 심노숭이야말로 음식에서 표현에다 품평에다 당대 기록을 겸한 인물 아닌가.

그러므로 더 궁금해진다. 서울 귀공자의 비웃음과 시골에서 글 좀 읽은 시골 사람은 어디서 만날지, 만날 수 있을지. 그런데 귀공자는 비웃다 말았다. 시골 사람은 탄식하다 말았다. 조밥과 용죽은 서로 등을 대고 서 있을 뿐이다. 모양 없이 덩이지게 썬 떡과 기기묘묘한 음식 사이에 접점도 통로도 없다.

위 인용문은 바로 <논어> 향당(鄕黨)편 속 한 구절인 “밥은 잘 찧은 쌀로 지은 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회는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공자(孔子)의 식생활로 이어진다. 귀공자나 시골 사람이나 공자의 일상 식생활을 배우면 된다고 했다. 이는 컵밥도 필요해서 나왔고 파인다이닝도 찾는 사람이 있으니 있다는 식의, 원칙론에 원칙론을 포갠 미봉이다. 그래서 섭섭한가, 아쉬운가 내 속내를 들여다본다.

섭섭하다. 아쉽다. 그런데 그만큼 고맙기도 하다. 오늘날 저마다 심노숭이다. 제 기호와 취향을 드러내는 연출 방법과 말글의 수사에서 그렇고, 그 드러냄을 통해 음식에 대한 제2, 제3의 욕망과 선망을 만들어가는 데서도 그렇다. 문자를 뛰어넘는 영상 덕분에 심노숭보다 더한 점도 있다. 그러고서는, 기호와 취향을 드러낸 다음은 여전히 공백이다. 모색과 상상력의 미봉이 그의 찬란한 수사 덕분에 더욱 또렷해진다. 아쉬움이 이정표다. 새해 하고도 며칠, 미봉한 채로 흐른 200년을 음미한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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