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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임금의 대명사인 순(舜)은 큰 지혜를 지닌 인물로 일컬어진다. <중용>에서는 순의 큰 지혜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좋아하고 하찮은 말 하나도 신중히 살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사랑한 제자 안연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에게까지 질문하고, 많이 알면서도 조금밖에 모르는 이에게까지 질문한 인물로 기억된다. 공자 자신도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고 무시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묻고 배우는 일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선 시대 학자 김창협은 숙종을 모시고 경서를 강독하는 자리에서,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 왕을 경계하기 위해 순과 안연을 거론했다. 절실하게 사색하고 빠짐없이 따져보다 보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잘 알아서가 아니라 의문이 생기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이렇게 매일 강독을 이어가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엄중히 질책하였다. 김창협의 이 말로 인해 숙종은 비로소 전날 강독한 부분에 대해 연달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우리나라 교실에 질문이 별로 없다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의미 있는 개선의 시도들이 적잖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우수한 학생들이 질문에는 유독 미숙한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워낙 잘 만들어진 인터넷 강의를 골라듣는 데에 익숙해진 학생들이어서, 대학 강의가 취향과 필요에 따라 스킵이 되지 않아 불편을 느낀다는 말도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진지하게 경청하고 창의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 심각한 것은, 질문 없음이 단지 교육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질문은 학습효과를 높이고 소통능력을 기르는 수단을 넘어서,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과 부속품을 가르는 지점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때 생기는 것이 질문이고,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문학이다. 다가오는 세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리가 배운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은 세상일 것이라는 점이다. 무엇을 배우는가보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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