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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서지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중간만 가라”는 조언을 많이 듣곤 한다. 약자로 살아가기 위한 보신 전략으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때로 이것이 중용(中庸)의 지혜인 양 설파되는 것이 문제다. “적당히 해라. 사람이 중용을 알아야지.” 남들은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지는 이를 향해 던지는 이 한마디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용의 중은 가운데를 뜻하지만, 그 가운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가운데를 찾아가는 것이 중용이다. 잔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채우는 게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맥주잔이라면 가득 채워야 중용이지만, 소주잔을 가득 채우면 과하다고 할 것이다. 늘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사심 없이 말랑말랑한 유동성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용의 핵심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해야 한다.” 까마득한 옛날, 순 임금이 음악을 통한 교육을 명하면서 했다는 말이다. 이를 실현한 인물로 거론되는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정하고, 공손하면서도 평안하다”는 평을 들었다. “직이온(直而溫)”에서 “공이안(恭而安)”까지, 모두 ‘이(而)’를 사이에 두고 서로 모순되기 쉬운 덕목을 나열하였다. 두 덕목의 중간을 취하라고 하지 않았다. 둘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동시에 가지기 어려운 것을 동시에 요구하였으니,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이 버릴 수 없는 이상에 중용의 본질이 있다. 공자는 순 임금을 두고 “양 극단 가운데 어느 하나도 놓지 않고 동시에 고려하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칭송했다. 바로 중용의 정치이다.

극단의 논리가 횡행하는 세태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노사분규의 현장에서든, 미투 운동의 전선에서든, 안일하게 중도를 말하는 것은 상황을 호도하거나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상황마다 얽혀 있는 사정을 쉽사리 재단할 수는 없지만, 때로 무게 차이가 심한 경우에는 한쪽에 치우친 곳을 잡아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일시적인 쏠림이 판 자체의 평형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중심을 잡으려는 지속적 움직임을 멈춘 채 고정된 기준을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순간, 누구든 ‘꼰대’가 될 수 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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