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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흠뻑 젖은 23일 아침 9시30분. 필리핀 남부 다바오시의 랜드마크인 4층짜리 대형 쇼핑몰 NCCC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3층 가구매장에서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위층으로 번졌다. 4층에는 미국에 본부가 있는 시장조사회사 SSI의 필리핀 지부 사무실이 있었다. 25일 현재 사망자 37명 중 대부분이 이곳 콜센터 직원들이었다. 소방관들은 화염과 연기에 4층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막말과 무자비한 마약범 단속으로 ‘악명’을 얻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도 유족들을 찾아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위로하지만 해결하지는 않는다. 필리핀 시민들은 화재 경보는 울렸는지, 비상구는 열려 있었는지, 스프링클러는 작동했는지, 정부가 건물주나 임대업자를 위해 눈감아준 것은 없었는지 묻고 있다. 다바오는 두테르테가 지난해 6월 대통령 취임 전까지 20년 넘게 시장을 지낸 곳이다. 지금은 딸과 아들이 이어받아 각각 시장, 부시장을 맡고 있다.

화재로 2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충북 제천시 하소동 스포츠센터에 26일 오전 높이 2m의 철제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지진, 홍수, 화재 같은 재난은 가장 극적이고, 가장 흉한 방법으로 그 사회의 모순을 까발린다. 2015년 5월 필리핀 수도 마닐라 외곽 발렌수엘라의 슬리퍼 공장 입구에서 용접 작업 중 불꽃이 튀어 근처 화학약품이 폭발했다. 노동자들은 2층으로 몰려갔지만 2층 창문에는 쇠창살이 단단히 둘러쳐져 있었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300페소(약 6400원)를 주는 공장에 스프링클러가 있을 리 없었다. 74명이 질식해 죽었다.

지난 6월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영국 그렌펠타워 화재는 공공주택 정책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런던의 부촌 켄싱턴첼시에 세워진 공공 사회주택 그렌펠타워는 노후되면서 관리가 민간회사에 넘어갔다. 이후 세입자를 더 받기 위해 아파트가 개조되고 출구와 계단은 하나만 남았다. 거주자들이 직접 단체를 만들어 안전 관리가 부실하다고 주장했지만 지자체는 법적 대응으로 압박했다.

2012년 11월 방글라데시 최악의 화재 참사로 기록된 다카 타즈린 공장 화재와 이듬해 4월 라나플라자 붕괴 사건은 주요 외화벌이이자 ‘노동착취 공장’이라는 비난을 듣는 의류산업의 현실을 고발했다. 월마트, 베네통, 망고 등 미국·유럽의 다국적 의류 기업에 옷을 납품한 라나플라자의 여공들은 관리인들에게 등 떼밀려 사고 전날 이미 금이 간 건물에 들어가야 했다. 1100여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재난이 모순을 드러낼 때는 극적이지만 모순을 풀어가는 과정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지지부진하기 일쑤고 정의는 원하는 만큼 구현되지 않는다.

라나플라자 사고 직후 글로벌 기업과 노조는 안전협약을 맺었다. 전반적으로 노동환경 안전이 개선됐다고들 하지만 비슷한 사고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최저임금은 한 달 38달러에서 68달러 수준으로 올랐다. 하지만 파키스탄(116달러), 인도(137달러) 등 주변국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필리핀 슬리퍼 공장 화재 조사위원회는 지난해 발렌수엘라 시장과 고위공무원 6명을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법원은 해임 처분을 중단시켰다. 그렌펠타워 이후 영국 전역 고층건물은 전수 조사에 들어갔다. 그렌펠타워와 유사한 외장재를 쓴 18m 이상 고층건물 173곳 중 안전점검을 통과한 곳은 8곳뿐이었다. 건축 규정은 총체적 재검토에 들어갔다. 테레사 메이 총리가 약속한 책임규명은 지켜봐야 한다.

제천 화재 참사는 알지만 고치지 못한 고질을 보여줬다. 9층 건물에 투입된 제천소방대 대원은 왜 4명일 수밖에 없었는지, 소방차 통행을 막지 못하게 하는 법안은 왜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지, 소방점검 시정명령은 왜 무시되는지, 비상구는 왜 늘 닫혀 있거나 물건이 쌓여 있는지. 민감하게 주시하고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인숙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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