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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게 비가 내리는 여름이다. 몇 년 전, 이런 식으로 계절감을 잃어버리고 지낸 적이 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출발해 사무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는 출퇴근을 반복하던 때였다.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씨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무실과 집은 물론이고 마트나 영화관 등 자주 가는 대부분의 장소에도 지하주차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차를 지하에 댄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내에 도착하면, 밖의 날씨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것이었다.


(경향DB)


계절과 상관없이 적당한 습도와 온도, 그리고 조명까지 유지하는 실내에 앉아 통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바로 그 느낌과 비슷하다.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우산을 써도 사정없이 들이치는 비바람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바람과 유리창을 때리며 흘러내리는 빗물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인데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느낌,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순간 내게 다가올 일인데도 실감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모기에게 물어뜯길 위험이 높은 자연 속 ‘캠핑(camping)’보다 자연 속 분위기를 느끼되 필요한 도구들이 모두 갖춰진 곳에서 안락하게 즐기는 ‘글램핑(glamping)’이 대세인 것처럼, 우리는 연출된 현실과 바라보는 역할에 익숙하다. “내 남자친구는 모니터 속에 있다”고 사뭇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젊은 세대를 비롯해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창을 통해 보는 세계가 현실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 (경향DB)


아파트에 사는 느낌이 꼭 그렇다. 층층마다 똑같은 구조의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풍경의 반복이다. 아파트 단지는 ‘개인의 고유한 삶’이라기보다는 ‘표준화된 도시인의 삶’을 재현하는 공간에 가깝다. 아파트뿐만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의 일상은 골목과 동네 상권을 집어삼키며 날로 거대해지는 편의점과 마트-각종 프랜차이즈-산부인과-노인요양시설-상조업체와 장례식장 안에서 표준화되는 중이다. 이 과정은 박철수 교수의 신작 <아파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박 교수는 “우리는 규격화된 삶의 유지를 위해 창조적 노동을 생활의 편리로 바꾸고, 이 모두를 돈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철저한 먹이사슬 구조에 따라 거대기업과 대형 유통업체로 유입된다”문제는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거대 유동자본이 주도하는 삶에 포박돼 표준화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그 착각 속에서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고, 아파트를 사고 마트와 각종 체인점을 들락거리며 그 돈을 소비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코스트코 중에 어디를 이용하느냐 혹은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커피빈, 카페베네 가운데 어느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느냐 정도의 차이뿐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소한 차이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기억과 추억은 닮은꼴이 되고, 모두의 이야기는 점점 비슷해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피라미드…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얼’ (경향DB)


조명 밝힌 화사하고 환한 유료 공간들을 얻는 대가로 우리는 잃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을, 돈을 내도 만들어낼 수 없는 그 무엇을 지불하는 중이다. 두부만 해도 그렇다. 내게 두부는 김이 펄펄 나는 통에서 한 사발 푸짐하게 떠 주는 뜨끈뜨끈한 순두부였고, 두부 트럭 주위에 모여 은근슬쩍 덤도 챙기던 소박하지만 즐거운 저녁시간과 동의어였다. 이런 기억들이 쌓일 때 한 사람의 일생은 다양한 빛깔로 채워질 것이다. 두부를 보고 마트의 1+1 두부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의 추억이란 얼마나 초라한가.


돈을 내도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들을 복원하기 위해, 이제 창밖으로 나와 비바람을 마주할 때다. 미술가 임민욱의 말처럼 ‘기억을 박탈당한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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