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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퇴근길이었다. 신호대기 중에 횡단보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김밥 한 줄을 손에 쥐고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아이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은 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능숙하게 은색 호일을 벗겨가며 김밥을 먹었다. 보는 내가 다 목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그 아이의 표정은 덤덤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김밥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그 아이의 뒷모습에서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꽤 오래전 영국에서 잠시 인턴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출근 첫날,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도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를 열고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그릇에 담고 각자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보면서 밥을 먹는 게 아닌가? 아침 티타임에 다정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서 있는 내게 누군가 너도 사온 게 있으면 먹으라며, 사온 게 없으면 나가서 먹고 오라고 알려주었다. 황망히 나가 샌드위치를 사들고 들어왔을 땐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식사가 끝나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도 1인용 테이블을 갖춘 식당이 제법 생겼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많이 덜하다. 그래도 여전히 분식집이나 푸드코트가 아니면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어려운 ‘미션’이고, 공부는 각자 하다가도 밥은 같이 먹는 ‘밥터디’(밥+스터디)가 생길 정도로 밥만큼은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끼니를 때워가며 일해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먹는 밥’마저 사치일 뿐이다. 류동민 교수의 신간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에는 기사 식당의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돼지불백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운전 중 들릴 화장실이 마땅치 않아 노상 방뇨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택시기사들이 화장실을 적게 가기 위해 국물 없는 메뉴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머니 얇고 시간 없는 노량진의 수험생들에게 ‘혼자서, 빠르고, 값싸게’의 삼박자를 충족시킨 컵밥이 최고 인기 메뉴였던 것과 다르지 않은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서 ‘혼자 먹는 밥’은 개인의 호불호와 기호에 따른 선택사항이라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해진 답에 가깝다는 얘기다.


‘나홀로 먹기’를 강요하는 노동 조건은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어렵게 만든다.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빵을 치킨패티로 대체하고 그 사이에 베이컨과 치즈를 넣어 출시한 버거가 엄청난 칼로리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인증 열풍을 불러온 바 있다. 내장파괴버거, 죽음의 돈가스 등의 ‘괴식’과 ‘역전! 야매요리’ ‘코알랄라’ ‘오무라이스 잼잼’을 비롯한 음식 웹툰의 인기는 혼자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허전함을 달래는 방편이 아니었을까? ‘짜파구리’를 유행시킨 ‘먹방 스타’ 윤후의 뒤에는 인터넷 방송의 실시간 ‘먹방’(먹는 방송)을 시청하며 밥을 먹는 15만명(하루 기준)이 존재한다.

KBS방송 캡처

그래서일까, 결혼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가 “같이 밥 먹는 사람이 생긴다는 게 너무 좋아서”라는 친구도 있었다. 자기가 차려 주는 걸 맛있게 먹는 모습도 예쁘고, 연인이 차려 주는 밥이 그렇게 맛있었다고. 특별한 메뉴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것도 아니고, 갓 지은 밥에 김치와 반찬 몇 개에 어설픈 솜씨로 끓인 국과 동그랑땡 정도가 전부였는데도 그 밥이 그렇게 맛있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는 거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으면서 축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주당 노동시간 세계 1위’의 한국 사회에서 친구 부부는 과연 한 달에 몇 번이나 알콩달콩 저녁밥을 차려 나눠 먹을 수 있을까? 아이가 혼자 김밥 먹으며 학원에 가지 않도록 키울 수 있을까?'


누구나 함께 밥 먹을 시간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혼자 먹고 싶은 사람은 혼자,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은 같이 먹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마저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동은 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영화 <황해>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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