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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환상은 경험의 근본이며
논리나 과학도 상상력이 근원
창의성엔 불안 이겨낼 용기 필요
두려움 넘어서야 창조성 발휘”


1990년대 중반, 인상적으로 읽었던 책이 한 권 있다. 저자도 제목도 모두 잊었지만 그 책이 주었던 자극과 의문이 여진처럼 오래 지속되던 책이다. 당시는 1980년대 젊은이들이 온 열정을 쏟아 추구했던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어가던 시기였다. 거대 담론이 스러지면서 지향점을 잃은 대중들의 관심이 개개의 인간에게로, 그들의 사소한 일상으로 전환되어 갔다. 문화계에도 개인의 사사로운 삶과 내밀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이 등장했고, 그런 작품들은 의외로 대중들의 호응을 크게 얻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책은 위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문화 비평서였다. 저자는 당시의 문화계가 사소한 개인의 일상으로, 의미 없는 감정 토로 현상으로, 나아가 자본주의적 향락 쪽으로 기울어지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있었다. 저자의 관점과 필력에 연신 감탄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그 책을 독파했다.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진하게 밀려오는 의문과 만났다.

“저자는 왜, 빛나는 판단력과, 뜨거운 열정과, 아까운 시간을 남의 작품을 비판하는 데 사용했을까? 그 모든 자산을 보다 창의적인 일에 사용했다면,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멋진 결과물을 낳았을까?”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는 열정과 재능을 창의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재능이나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창의적인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다. 가끔 창의성이 어디서 오는지 묻는 이도 있었다. 간혹 나 자신조차 상상력이나 예술 작품은 그저 삶에 더해지는 장식적인 요소가 아닐까 묻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상상력, 환상, 자기표현 등이 인간 경험의 근본이며, 논리나 과학조차 예술적 상상력을 근간으로 발현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프로이트 학파 정신분석학자들은 창의성이 상실한 대상을 복원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제안한다. 성장기에 중요한 대상을 상실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환상 속에 그 대상을 복원하여 간직한다. 내면에 간직된 표상, 혹은 환상 대상은 그 사람이 상실의 구멍에 익사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 준다. 생각해 보면 1990년대 중반 우리 문화계에 등장했던 ‘후일담’ 작품은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대상을 이야기로 만들어 내면에 간직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창의성이 무의식적 자기치유 행위라고 제안하는 심리학자들은 더 많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여전히 시를 쓰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답한다. “예술이 없었다면 죽음과 맞선 싸움을 할 수 없었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의 내밀한 핵심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모리스 시퀼니크 <불행의 놀라운 치유력> 중에서). 자기 이야기하기, 자기 감정 표현하는 행위는 그대로 그 사람을 회복시켜 계속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모든 예술을 치료 도구로 사용한다. 자기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 지점 위에서 삶에 대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1990년대 중반 문화계를 휩쓸었던 감정 과잉의 예술 작품들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치러낸 집단 치료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융 정신분석학에서는 창의성을 집단 무의식에 닿는 행위라 여긴다. 집단 무의식은 인류의 역사적 삶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 내면에 간직된 공통된 무의식을 뜻한다. 그것은 개인들의 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존재하며, 신화나 신성의 영역과도 닿는다고 한다.

융은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집단 무의식 지점에서 나온다고 제안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이 절로 진행되어 첫 의도와 다른 결과에 도달한다는 경험을 토로한다는 점을 그 증거로 본다. 기독교 문화권 심리학자 중에는 창의성을 설명하기 위해 ‘영감 받다(inspied)’라는 단어를 파자한다. 그것이 ‘성령 안에 있다’는 뜻이고 창의성이란 성령의 작용이라는 설명이다. 그 설명 역시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과 같은 토대 위에 서 있는 듯 보인다.

모든 단계에서 창의성은 불안을 이겨내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잃은 대상을 미워하지 않고 내면에 간직하기 위해서도,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집단 무의식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창조 행위가 집단 무의식 영역으로 내려갈 때는 그것이 신성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라는 무의식적 두려움을 갖게 된다고 한다. 용기 내어 창의성을 발휘하는 그 순간조차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를 또 내어야 한다.

환상, 상상력, 표현력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삶의 에너지나 치유 도구가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는 총체적이고 기본적인 역량이다.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삶의 비전을 만들고, 창의성을 발휘해서 비전을 구체화시키는 방법들을 찾아낸다. 자기만의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역량이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미국 심리학자 롤로 메이는 <창조와 용기>라는 책에서 개인의 창의성이 사회 변화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한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고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개인의 창의성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덕적 용기가 잘못을 바로잡는 일인 데 반해 창조적 용기는 변화하는 사회의 새로운 형태, 상징, 패턴을 발견하고 앞길을 제시하는 데 필요하다. 어떤 직업 분야에서든 창조적 용기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사회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형태와 상징을 즉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제시하는 이들이 예술가이다.”

이따금, 1990년대 중반 깊은 인상을 주었던 그 책 저자가 궁금했다. 그는 더 이상 책을 쓰지 않았지만 당시 그가 비판했던 예술가들은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2000년대 중반쯤, 편한 지인들 모임에서 그 저자를 만났다.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묘사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가 혼잣말처럼 뱉었던 문장이 섬광처럼 심장으로 들어왔던 일이 기억난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발휘하는 거지?” 그 순간 오랜 의문이 풀렸다. 그가 아까운 재능을 창의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를.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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