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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배 여성은 아버지의 폭력 피해자였다. 그 아버지는 아내도, 다른 자식도 때리지 않았는데 유독 큰딸에게만 폭력을 행사했다. 무언가를 잘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집안에 회초리를 마련해두고 잘못하는 일이 발견될 때마다 아이에게 직접 매를 가져오게 했다. 맞는 게 공포스러웠던 아이가 장롱 뒤편으로 회초리를 숨기자 “이게 안 맞으려고 별 꾀를 다 쓴다”면서 딸의 눈앞에서 PVC 관을 잘라 새 회초리를 만들었다. 관 위에 청테이프를 감으면서 “이렇게 때리면 자국이 남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노출 심한 옷차림에, 18세기에서 온 듯 온순한 태도를 취했다. 그 온순함은 온 힘을 다해 아버지의 폭력에 적응한 결과였다. 대신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스물일곱 살에 이미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와 파괴적인 연애를 하는 중이었고, 극단적 자기파괴 충동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한 발 내디딘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로부터 약 6년 동안 나는 그녀가 자신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변화를 모색하는 고비마다 그녀는 힘겹게, 온 힘을 다해 용기를 쥐어짜곤 했다.

후배 여성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용기는 ‘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였다. 자신이 꽤 착하고 옳은 사람이라는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이미지를 벗어내고, 알코올로 회피해온 내면의 고통과 직면했다. 가족의 희생양이었던 유년기의 공포를 경험하고 표현하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용기를 냈다. 아프고 슬프고 찌질한 과거가 있어도 괜찮고, 다만 그것이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용기라는 단어(courage)는 심장을 뜻하는 프랑스어(coeur)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심장이 뇌와 팔다리로 피를 보냄으로써 신체 기관이 작동하도록 하듯 용기는 정신의 모든 미덕이 가능하도록 하는 근원이다. 용기가 없다면 삶의 가치들을 실천하거나 이행할 수 없다. 우리가 한 걸음 성장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두 번째 용기는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였다.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 아버지에 대한 의존성을 버릴 수 없었던 유년기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지워냈다. 폭력적인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노력하고, 나쁜 남자와 상호의존하는 성향을 버렸다. 의존할 사람을 성급하게 찾는 대신 혼자 있을 때의 불안을 이겨내는 법을 배웠다. 한 번씩 불안을 넘어설 때마다 내면에서 마음의 힘이 조금씩 커지는 것을 경험해나갔다.

용기는 무기력이나 절망감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사르트르 등 많은 철학자들이 용기를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늘 불안하거나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기에는 성찰과 저어함이 동반된다. 머뭇거림 없이 돌진하는 행동은 만용이며, 무의식의 공포를 감추기 위한 행위이다.


▲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려온 여성
극단적 자기파괴 충동을 이긴 힘은
고통을 직면하고, 불안을 이겨내고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용기였다”


후배 여성이 마음으로부터 찾아낸 세 번째 용기는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용기’였다. 그녀는 대학에서 전문 분야를 공부했지만 내가 만났을 때는 전공과 무관한 단순 반복 업무를 하고 있었다. 사실 디자인이나 요리에 재능이 있었고 그 분야에서 자기 삶을 개척하고 싶다는 소망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창의적인 일을 하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격려나 지지는커녕, 작은 실수에도 매를 맞았던 유년의 공포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녀에게 쿠션 커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온순한 태도로 그러겠다고 대답한 후 거의 열 달쯤 지나서야 결과물을 가지고 왔다. 기대 이상의 솜씨였지만, 예상보다 깊은 공포의 늪을 지나왔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 그녀는 잠재력과 창의성을 한 뼘씩 표현해나가며 새로운 자기 개념을 만들어갔다.

우리가 용기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내면에 확고한 자기 개념과 자기 존중감이 있어야 한다. 용기는 미덕이나 충성심 같은 정신 가치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 존재하면서 미덕과 충성심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뿌리가 된다. 용기가 없으면 사랑은 단순한 의존이 되고, 용기가 없으면 충성심은 순응주의에 불과해진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성취한 용기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용기’였다. 성찰과 치유를 시작한 지 2년쯤 후 그녀는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 분야로 이직했다. 예전보다 임금은 적어졌지만 삶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하지만 더 깊이 내면을 성찰해보니 요리나 커튼 만들기는 유아기 소망이었다. 그런 일을 잘하면 엄마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매 맞는 아이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유아기 소망을 버렸다. 그런 다음 처음으로 자기 자신으로만 존재하면서 새로운 삶의 비전을 모색했다. 그녀는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상담심리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우리의 삶은 늘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과정들이다. 그 고비마다 선택하는 용기와 포기하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선택한 대상에 헌신할 수 있는 용기를 내어야 하고, 포기한 대상들을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그런 용기와 헌신, 애도와 연민의 마음들이 모여 우리의 존엄성과 삶을 만들어간다. 일찍이 폴 틸리히는 “용기는 존재 그 자체와 직결되는 요소이다”라고 말했다.

후배 여성이 용기를 내어 자신을 변화시켜온 과정이 위에 기술된 순서에 따라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위치백 구간을 오르는 열차처럼 용기와 무기력, 진보와 퇴보의 긴 과정이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데는 1년 이상 걸렸고, 자기 내면의 힘을 믿는 데는 3년쯤 필요했다. 알코올로부터 걸어나오는 데는 5년이 소요되었고, 새로운 진로로 들어선 것은 최근 일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용기를 짜냈다. 그것은 한 편의 영웅 스토리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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