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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일러스트가 그려진 투명 유리컵에 아이스 커피를 채우고, 파란색 도라에몽 다이어리를 편다. 볼 때마다 괜히 웃긴 컵도, 몰스킨 뺨치는 다이어리도 돈 주고 산 게 아니고,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물건이다.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살 때 받은 굿즈(goods)이기 때문이다. 머그컵이나 부채 정도로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었던 굿즈는 언제부턴가 냄비 받침, 파우치, 마우스패드, 담요, 북램프까지 나날이 다양해져 가고 있다. 도무지 안 사고 배길 수 없는 ‘취향 저격’ 굿즈도 점점 늘어난다.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린 게이블즈’ 지도와 특별 제작한 찻잔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저런 찻잔 사고 싶었잖아.’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예정에 없던 책을 사는 것은 순식간이다. 보는 순간 “어머, 이건 사야 해”를 외쳤던 굿즈도 있다.
소설 <랑야방>과 함께 등장한 ‘상지기 노트’였다. 소설과 드라마 속 소품을 그대로 재현한 이 노트는,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탁월한 아이템이자 뼛속까지 독자의 취향을 아는 이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역작이었다.
그래 봤자 끼워주는 사은품 아니냐고? ‘이렇게 좋은 걸 자꾸 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품질이 괜찮을뿐더러 돈 주고 사긴 아까운데, 있으면 유용한 아이템이라 자주 쓰게 된다. 문제는 이 아이템들을 갖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다는 점이다. 특정 장르나 출판사의 책을 사는 것은 기본, 일단 5만원 이상의 책을 구매해야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에는 마일리지를 써야 받을 수 있도록 기준이 대폭 강화되긴 했다. 그러나 갖고 싶은 아이템이 너무 자주 등장하고, 다른 독자의 굿즈 후기에 마음이 갈대처럼 팔랑거리기 일쑤다. 결국 “굿즈를 샀더니 사은품으로 책이 왔어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출처: 경향신문 DB
굿즈가 점점 쌓여가고, ‘산 책이나 다 읽자’ 싶어서 한동안 책을 안 사고 버틴 적도 있었다. 때마침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미니멀라이프’가 유행이었다. 그러자니 가장 먼저 버리고 줄여야 할 것이 책이었다. 읽지 않는 책이 쌓여가는 것이 스트레스이기도 했기에, 도서관을 다니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가득 책을 빌려오는 바람에 다 읽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고, 2주 안에 책을 읽고 반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납 스트레스가 겹치자 도서관은 오히려 안 가느니만 못한 상황이 됐다. 빌리나, 사나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고, 신간을 읽는 즐거움마저 사라지자 아예 손에서 책을 놓게 됐다. <무소유>를 읽는다고 무소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듯,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책을 읽는다고 ‘심플 라이프’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여전히 굿즈에 낚이는 ‘호갱(호구+고객)님’으로 돌아왔지만, ‘보고 싶은 책을 사는데, 유용한 아이템도 생긴다’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유야 어떻든 새로운 책을 사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들춰 보기 마련이고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 ‘읽지 않은 책’에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저 책들은 언제 읽을까’ 느긋하게 궁리한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듯, 내가 산 책이라고 해서 전부 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하니 마음이 편하다.
그래도 여전히 책은 서점에서 살 때가 가장 좋다. 동네 서점도, 요즘 많이 생기고 있는 독립서점도 괜찮은 선택이다. 속초 동아서점, 통영 남해의봄날, 괴산 숲속작은책방, 선릉 최인아책방, 인천 세든서점까지 지역별로 특색 있는 동네 서점들을 가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다. 개성 넘치는 주인이 선별한 책으로 채워진 매력적인 공간에서의 시간은 인터넷 쇼핑으로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고르고 사는 게 더 즐거운 요즘, 이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 ‘다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세상은 넓고 살 책은 많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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