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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이면, 정동길을 걷는다. 정동길을 걷는 행위는 공간 여행이라기보다는 백년의 시간 여행에 가깝다. 1㎞의 짧은 거리이지만, 양편으로 자리 잡은 근대 건축물들의 내역을 살피며 안팎을 들고 나다보면 겨울해가 서쪽으로 훌쩍 기울어진다. 정동길 산책의 정점은 정동극장과 정동교회, 서울시립미술관이 만나는 삼거리이다. 정동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으로 서양화가 나혜석이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옛 대법원 건물을 퍼사드(정면)만 남기고 개조한 곳으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아치형 현관에 고딕식 3층 건물이다. 나는 정동길을 걸을 때면, 반드시 이 미술관 뜰로 들어서서 단아한 퍼사드를 감상하곤 한다.

올 십이월 정동길 여행은 좀 특별하다. 두 사람을 마음에 품고 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최근 타계한 천경자 화백이고,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의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이다. 마리 로랑생은 1920년대 전 세계 화가와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던 시절 피카소, 마티스, 샤갈 등의 남성 화가들 속에서 홍일점으로 활동을 했다. 피카소의 입체파가 몽마르트르에, 마티스의 야수파가 몽파르나스에 진을 치고 각축을 벌이던 파리에서 그녀는 꽃, 새, 당나귀, 소녀, 코코 샤넬의 초상화 등을 파스텔 톤으로 채색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그녀의 사랑스럽고 몽환적인 세계는 20세기 복제기술의 흐름을 타고, 유럽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 벽을 장식하기 좋은 장면들을 제공했다. 그녀는 신비롭고 부드러운 색과 형상을 화폭에 연출했지만, 실제 그녀의 삶과 사랑은 비극적이었다. 시인 아폴리네르와의 사랑과 이별, 적국 독일귀족과의 결혼과 프랑스 해방, 이혼과 귀국 금지, 그리고 긴 방랑. 분절된 몇 마디로 압축된 그녀의 생(生)에는 파란 많았던 20세기의 지난한 사랑과 예술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천경자의 그림을 감상하려면 정동길의 서울시립미술관에 가야 한다. 그리고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감상하려면 파리 센 강변의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야 한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세계 최대 인상파 컬렉션인 오르세이미술관에 이어 인상파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백미는 모네의 <수련 연작> 정본이다. 2년 전 5월, 모네 작품 컬렉션으로 유명한 파리 마르모탕-모네 미술관에서 희귀한 전시가 열렸는데, 전 세계 마리 로랑생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선보인 작품들 중 대부분의 소장처는 도쿄였다. 마리 로랑생이 독일귀족과의 결혼으로 인해 프랑스 국적을 회복하지 못한 채 떠돌면서 작품 관리가 허술하던 시절, 한 평범한 일본인 은행가가 수집하기 시작해 평생 모은 결과였다.

예술가와 예술에 대한 예의는 단발에 그치지 않는 가치의 공유와 보전에 있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그것을 찾아가는 마음의 설렘과 황홀을 사랑한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머지않아 천경자의 그림들이 세상에 모두 나와 축제처럼 한자리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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