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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신춘문예 계절이다. 십이월 신문사 문화부에는 국내외에서 투고한 창작품들로 산더미가 만들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문학이 죽었느니, 자기계발서 이외에 아무도 시-소설나부랭이를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느니, 하는 진단과 종언을 무색하게 하는 희귀한 장면이다.

매일 눈을 뜨고, 감는 순간 자문한다. 왜 쓰는가. 덧붙여, 누가 쓰는가. 소설가들이란 ‘나는 누구이고,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심하게 흔들린 사람들이다. 소설이란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자 해답을 찾는 과정이다. 해답은 찾아질 수도 있고, 찾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길을 떠나지만, 아득한 과거, 아름다운 시절의 주인공들처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표류할 뿐이다. 현대소설의 대상이 동시다발적이고 다중심 매체 환경의 인간이기에 일목요연한 정답을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설가의 머릿속에는 어딘가에 있을 법한 바람직한 나와 세상의 의미로 가득 차 있기에, 대개 현실에서는 부적응자로 치부된다. 아무리 찬란한 권력이 보장된다고 해도, 한번 소설가의 자의식에 사로잡히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아야 한다. 파리 법대를 자퇴한 귀스타브 플로베르, 프라하 법대 출신의 프란츠 카프카, 파리 법대 출신의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 출신의 폴 오스터 등이 대표적이다.


경향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본사 회의실에서 예심을 하고 있다._경향DB


그렇다면 누가 소설가가 되는가. 20세기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일단, 장남이 아니어야 했다. 골방에 틀어박혀 읽고 쓰거나, 세상을 떠돌아다녀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의 유산이 보장되어야 했다. 전쟁이나 보릿고개 체험, 육친의 죽음이나 근친상간 같은 원체험의 불행한 상처가 삶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해야 했다. 소설가가 되는 조건에서 장남이 제일 먼저 제외된 것은 가부장제의 전근대적인 관습 때문이었다. 장남은 집안의 기둥으로, 세상에 나가 이름을 떨치고, 가족을 부양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청소년기 감성의 시기에서 현실 감각을 체득하는 성인 남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 쓰기의 표현 욕망과 지면(紙面)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킨 매력적인 직종이 존재했다. 바로 신문 기자였다.

현대의 속성은 견고한 것들이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깃털처럼 부유하는 세계이다. 21세기의 시공간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기에 어떤 것도 고유하지 않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신문 지면의 힘은 인터넷 매체환경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오로지 문학만이 덧없음에 맞서 내가 겨우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이 때로 아름답다는 것을 되새겨줄 뿐이다. 일찍이 그것을 터득한 기자 출신 작가가 20세기의 헤밍웨이, 카뮈, 김훈이고, 오늘의 장강명이다.

소설가란 단 한 순간도 쓰지 않으면 사는 데 의미가 없다고 자각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작가만의 운명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속성이되, 대부분 쓰지 않을 뿐이다. 신춘문예의 계절,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기리며, 새삼 작가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다시, 펜을 들어야 할 순간이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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