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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로 출장을 가면서 쌍계사에 들렀다. 아침부터 일이 진행되는 관계로 하루 전에 출발했다. 지리산 자락의 마을들과 섬진강 물길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남해고속도로에서 하동으로 빠져 섬진강에 산다는 은어처럼 유유히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달려도 시멘트 콘크리트 빌딩 숲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서 찢기고 지친 넋을 달래듯 온화해졌다. 빛과 그늘의 분명한 조화, 강물과 바람의 고즈넉한 흐름, 포구의 보드라운 모래와 산 능선들의 운치, 눈 닿는 데마다 푸르른 차밭, 그리고 소나무 쌍계 계곡까지 계속되는 벚나무길. 섬진강변을 달릴 때면 외치고 싶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꼈다.

봄이면 쌍계사를 꿈꾸곤 했다. 쌍계사, 화개(花開), 다솔사를 무대로 펼쳐지는 김동리의 단편 <역마(驛馬)>를 읽은 뒤였다. <역마>는 떠돌이 팔자(운명)를 타고난 소년과 어머니, 그리고 소년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이다. 끊임없이 떠나든 한 판 싸우든 갈등과 불화를 겪으며 운명과 마주함으로써 평온에 이르는 김동리의 구경적(究竟的) 세계관이 잘 구현된 단편소설이다.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국내외 여기저기를 수시로 떠나는 내 삶 역시 역마의 소년 못지않다. 김동리의 주인공들이 떠돌이병을 앓는 20세기 문제적 개인이라면, 오늘날 한국 소설의 인물들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21세기 떠돌이들, 곧 노마드들이다.


하동 쌍계사_경향DB


쌍계사에는 봄에, 그것도 산수유 벚꽃 만발한 상춘절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 것은 윤대녕의 단편 <3월의 전설>을 읽은 뒤였다. 이 소설에 의하면 봄이 오면 쌍계사, 화개로 향하는 것은 본능에 관계된 일이다. 화개.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되게 어지러워지고”, 닿지 않으면 병이 도지는 신비로운 곳이다.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처럼,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울까봐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나는 하동 포구, 평사리, 악양, 화개, 구례, 다솔사를 오가면서도 정작 쌍계사에는 닿지 않았다. 세월 속에 역마살의 운명도, 3월이면 도지는 병(전설)도 겨울 햇살처럼 말갛고 담담해졌다.

광주 가는 길, 섬진강변에 이어 쌍계사에 닿을 생각을 한 것은 이기호의 단편 <밀수록 가까워지는>을 읽은 뒤였다. 이 소설은 1980년대 어느 날, 할머니가 장가보내기 위해 사준 프라이드 자동차와 하나가 된 삼촌의 짠하고 기이한 역사를 조카인 내가 전하는 형식이다. 장가는 가지 않고 20년 동안 분신처럼 함께했던 프라이드 자동차를 남기고 떠난 삼촌을 찾아온 곳이 다름 아닌 쌍계사 입구이다. 삼촌의 프라이드 자동차는 후진 작동이 안 된다. 궁지에 처한 프라이드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미는 방법밖에 없다. 소설은 밀수록 가까워지는 드문 경우를 애써, 따뜻하게 마련해준다.

겨울의 미덕은 눈을 홀리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봄의 폭발하는 색과 향과 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보는 것마다 처음으로 돌아가 민얼굴, 맨정신이다. 한겨울 쌍계사 일주문 안으로 한 발 옮겨 디디며, 아직 씌어지지 않은, 미지의 소설을 생각했다. 정수리에 와 닿는 햇볕이 따뜻했다.


함정임 | 소설가 ·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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