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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왔었다. 바싹 다가오지도 않고 아주 도망치지도 않은 채로 가게 앞을 서성였다. 무언가 도움을 청하는 눈치였다. 다리를 절고 있었다. 뒷다리에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가 보였다. 피가 굳은 상태로 보아 다친 지 제법 된 것 같았다. 조치를 취해주고 싶었지만 그만큼의 거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먹을거리를 좀 챙겨주었다. 내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접시에 입을 댔다. 비쩍 마른 몸이 그동안의 고초를 짐작하게 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잠시 누웠다 가기도 했다. 멀찍이 떨어져 쳐다보고 있으면 꼬리를 한두 번쯤 흔들어주곤 했다. 해가 안 되는 인간이라는 걸 증명한 것 같았다. 그걸로 되었다 싶었다. 딱 그 정도의 거리가 좋았다.

그 고양이가 담장 사이 좁은 틈새에 새끼를 낳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사람 하나 옆으로 서서 겨우 움직일 만한 폭의 막힌 공간. 바로 그 점이 새끼를 낳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로 선택한 이유였을 것이다. 축 늘어진 배는 그냥 배를 곯아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어미는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 날랐다. 나는 어미와 새끼를 위해 두 가지로 먹이를 준비해 주었다. 먹고 갈 수밖에 없도록 잘게 다진 것과, 물고 가기 좋은 덩어리로. 가끔 담벼락 위로 고개를 빼고 젖 먹이는 어미 고양이의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어미는 내가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느긋하게 꼬리를 저었다. 코앞에 먹이를 놓아주어도 내빼지 않을 만큼 거리가 줄었다. 좁혀진 거리만큼 애틋해졌다.

하지만 그곳은 오래 눌러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빛은 아주 잠깐 들었다 나가고, 비와 바람은 피할 길이 없었다. 새끼들은 깨진 병과 건축자재와 쓰레기 위를 기어 다녔다. 그곳이 새끼 고양이들의 첫세상이었다. 어미는 결국 거처를 바꿨다. 새끼들을 하나하나 물어 담장과 처마 사이의 더 좁은 공간으로 옮겼다.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새끼들의 세상은 이제 담장 사이에서 담장 위로 올라갔다. 장난치고 매달리고 걸터앉고. 담을 따라 반경을 넓혀가고. 아슬아슬한 곡예가 이어졌다. 담은 그들의 집이고 놀이터고 길이었다. 그들의 세계였다. 

지나가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따스한 봄날, 담장 위의 새끼 고양이들. 낡은 벽과 전봇대 얽힌 전선들 벽돌 사이 비집고 올라온 여린 풀을 배경으로. 노랑고양이 검정고양이 줄무늬고양이 점박이고양이. 그야말로 지나가던 사람들을 멈춰 세우는, 그림이 되는,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연남동 골목을 순회 중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한 컷 건지게 된 순간. 어쨌거나 마음이 훈훈해지는 봄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벽 뒤쪽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음산한 울음소리였다. 그저 벽을 타고 울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들리는 건 아니어서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여전히 그곳에서 새어나오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울음소리. 살펴보니 화장실이 있는 쪽 벽 사이에 한 뼘 정도의 또 다른 틈이 있었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담. 어쩌다 그곳에 떨어졌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을 해야 했다. 인근 공사장에서 기다란 각목을 두 개 얻어와 바닥에서 벽으로 비스듬히 세워두었다. 어미 고양이가 그 길을 따라내려가 데려오든, 새끼 고양이가 직접 타고 올라오든, 그건 그들의 몫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였다. 구조대를 부르고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며 뚫고 파고 몰고 잡고 환호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빌려온 각목은 이틀 뒤에 돌려주었다. 태어난 새끼는 모두 여덟 마리였다. 담장 위에서 확인된 새끼는 여섯 마리였다. 나머지 두 마리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그 두 마리 중 하나가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살아남은 새끼들의 두 번째 이동이 시작되었다. 한여름 뙤약볕을 버티기에 그곳은 너무나 혹독했다. 어미는 항상 담 아래 있었다. 울음소리를 내 유인만 할 뿐, 직접 물어 나르거나 엉덩이를 밀거나 하지 않았다. 겁이 많고 약한 새끼들은 여전히 담장 위에 남았다. 먼저 담벼락을 타고 내려온 새끼가 먼저 신선한 물과 음식을 맛보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내려와야만 볕 좋은 테라스에서 어미 고양이의 꼬리를 가지고 노는 자유를 누렸다. 어미는 먼저 내려온 네 마리의 새끼를 데리고 사라졌다. 남은 두 마리는 그대로 둔 채.

가장 겁이 많고, 가장 허약해 보이는 두 마리만 남았다. 어쩌다 한 번씩 들러서 신호를 보내는 어미 고양이를 아래 두고도 도무지 용기를 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남겨진, 혹은 버려진 새끼들을 위해, 나는 벽돌계단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지낸 사이,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도 마저 사라졌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 담장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정하게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늘 그 장소에 먹이를 놓아두어도 입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번쯤 찾아올 만도 한데. 어딘가 더 안전하고 더 쾌적한 곳에 정착을 했으리라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괜히 허전하고 이상하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 시절이 꼭, 가버린 봄날, 다시 못 올 봄날인 것만 같았다.

애틋한 마음으로 담장 위를 올려다보던 그 봄. 나는 책임이라는 단어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저 중의 한둘이라도 데려가 안온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담장 위나 공사장 한켠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길고양이의 생을, 내가, 바꿔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 스스로 집사라 칭하며 떠받들어지는 다른 고양이들의 반에 반만이라도 안온한 삶을 누리게 해줄 수는 없을까? 그것이 책임을 지는 방법 아닐까? 하나의 생을 대신 책임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다른 생에, 얼마만큼의 개입을 할 수 있고 해도 되는 걸까? 그냥 그들이 허락한 거리만큼?

며칠 전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왔다. 담 위에서 제일 먼저 내려왔던 새끼의 줄무늬와 똑같았다. 눈 위의 검은 줄도 여전했다. 쓰레기봉투를 뒤지던 어린 고양이는 나를 보고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어제는 어미 고양이가 왔다. 배를 보니 다시 임신을 한 것이 분명했다. 내 앞에 처음 모습을 보였던 그날처럼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챙겨준 밥도 먹지 않고. 어쩐지 탓을 하는 눈빛이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이제 막 겨울의 초입인데. 어쩐지 꽃그늘 아래 울고 앉은 심정이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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