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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토중래라는 말은 자주 사용되는 사자성어다. 직역하면 ‘땅을 말아서 다시 오다’인데, 패배 또는 실패한 후에 재기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권토’는 기병부대가 말을 달릴 때 흙먼지가 나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땅을 말아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린다는 표현으로 썼다. 유래는 초한전쟁의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다. 유방에게 속아서 패한 뒤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 항우는, 도주하다 오강(烏江)에 닿았을 때, 강을 건너 후일을 도모하라는 부하의 애원을 거절하고 자결해버렸다. 항우는 당시 9개 군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자살하기 직전까지도 5개 군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항우가 강을 건너 재기를 노렸어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시를 통해 항우가 권토중래하지 않았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권토중래는 현재 한국 외교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표현이 될 수 있다. 11월 초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는 정상외교 슈퍼위크라고 불러도 될 만큼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졌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아세안 정상회의 등이 줄을 이었고, 한·중 정상회담도 있었다. 내용적으로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 기치 아래 한반도와 동북아의 지정학적 위기상황까지 장사꾼의 관점으로 활용해온 트럼프의 방한은 예측불허의 돌발 상황도 가능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 전쟁위기를 고조시키는 공격적 발언도 거의 없었고, 한·미 양국의 이견도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트레이드마크인 트위터 도발도 전반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다음으로는 트럼프 방한 일주일 전인 10월31일에 한·중이 사드 문제 해결을 위해 사드 추가배치, 미사일방어체제 참여, 한·미·일 군사동맹에 대한 3가지 불가 입장을 표명했고, 이후 문재인대통령이 동남아 순방 중 만난 시진핑과 관계정상화의 시동을 걸었다. 대중 굴욕외교이며 한·미동맹을 훼손했다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관계개선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과 동북아 신냉전으로의 연루를 예방한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결정이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선언한 신남방정책은 동북아 안보딜레마에 매몰되지 않고 중장기적 번영을 위한 역내 경제 비전이자, 동북아의 진영대결구조와 안보딜레마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적 다자체제로서 중요한 함의를 가진 전략이다.

하지만 반드시 지적되고 경계해야 할 지점이 있다. 박근혜의 사드를 포함한 외교 실패로 최악으로 갔던 것을 다시 미·중 사이에서 운신의 폭이 복구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다만 이를 과대평가할 경우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다. 미·중 사이의 실용적인 균형외교를 하겠다던 박근혜 정부가 원칙이나 치밀한 전략 없이 미국에는 미국이 원하는 얘기를, 중국에는 중국이 원하는 얘기를 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외교의 공간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상태를 되돌려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지점에 돌아온 셈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으로 망가졌던 내치는 물론이고, 외교도 서서히 늪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3불 입장표명으로 인해 미·중 모두의 압박에 시달릴 위험성도 여전히 남아있다. 중국은 사드 반대 입장을 번복한 것이 아니라 투트랙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즉 중국이 사드 배치 반대라는 기본입장은 유지하되, 한국과의 실용적 관계는 분리해서 복구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3불 입장을 놓고 미국의 아시아전략의 한계를 한국이 규정하는 것이므로 수용하기가 어렵다는 불만이 워싱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한·미·일 군사협력은 트럼프 정부가 대중국정책의 핵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바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북핵이라는 난제가 남아있다. JSA 북한병사 귀순과정에서의 대응사격 부재에 대한 비판보다 먼저 따져야 할 부분은 전쟁 중이라도 대화채널은 이어가야 하는데도 메가폰으로 북한의 정전협정위반을 따져야 하는 무채널 상황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에서 군사회담 복구 필요성을 말한 가장 큰 이유다.

권토중래를 포기하고 죽음을 택한 항우를 안타까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면에 항우가 강을 건넜다고 하더라도 전세를 뒤집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송나라 문인 왕안석은 항우가 자결하지 않고 강을 건넜다고 하더라도 세력을 회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외교의 운신 폭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지만, 두목과 왕안석 중 누구의 예상이 맞았을 것인지는 지금부터 외교와 대북정책을 얼마나 제대로 하느냐에 달려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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