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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일자 지면기사-

돈키호테는 어떻게 죽었어? 누군가 물었다. 처음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물어온 것은. 그렇지, 돈키호테의 모험에도 끝이 있었지. 그를 집으로 데려오지 못해 안달이 난 학사 카라스코의 계략에 의해. 결투에서 패배하면 기사임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서 일 년 동안 나오지 않겠다고 약속한 탓에. 패배한 그가 도망가지 않고 약속을 지킨 탓에. 그는 집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는다.

돈키호테가 죽은 것은, 결과적으로는 우울증 때문이었어. 우울이 극에 달해서. 말이 돼? 돈키호테가 우울증이라니. 햄릿도 아니고 돈키호테가? 미치광이로 재미나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 수 없게 되었으니 우울할 수밖에. 그런데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고해를 하고 틀어박히니 병이 들 수밖에. 그 안에서 곡기를 끊고 죽기를 기다린 것이지. 어쨌거나 우울해서 죽은 거야. 에이 돈키호테가 우울증이라니, 실망이야, 말도 안돼. 이 말을 몇 번이고 되뇌던 그는 내게 화살을 돌렸다. 그런데 넌 언제 끝낼 거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내게 물어오는 것은 대부분 시작에 관한 것이었다. 어찌하다 식당을 열게 되었는지, 어찌하다 돈키호테에 빠져들었는지, 돈키호테는 어쩌다 돈키호테가 되었는지. 그리고 돈키호테의 모험을 기대하듯, 내 모험담을 듣고 싶어 했다. 고난과 극복과 재미와 설움과 그 밖의 모든 체험에 대해. 나 또한 그랬다. 연애의 시작과 과정은 언제나 설레고 짜릿하니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다양하게 지랄 맞고 서글픈 일인지라,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끝을 묻다니. 실은 끝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은 세세히 하지 않았다. 시작보다 어려운 것이 끝을 맺는 일인지라.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하면 다른 시작도 불가능한지라, 시작만큼 공들여 끝을 맺을 궁리를 하는 중이라고. 

시작이 반이라 했다. 아무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시작도 못하고 사라지는가. 두려워서 자신이 없어서 확신이 없어서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 무언가 모자라서 끝이 뻔해서 지금은 때가 아니어서. 머릿속에서 가슴에서 종이 위에서 흩어진 파일 속에서. 그림이든 글이든 사랑이든 사업이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시작하지 않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 시작을 하는 순간 실체가 생기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는 법. 그러니 시작을 했다는 것은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것. 그 반의 동력이 대단하다는 것. 그 힘으로 수레의 바퀴는 어쨌거나 굴러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작을 하고 볼 일이다.

돈키호테의 시작을 되돌아보았다. 시작은 불현듯 기사차림을 하고 광야로 나선 형국이었지만, 그동안 전답을 팔아치워 사들인 기사도 책이 없었더라면, 그 책에 몰입해 스스로 등장인물이 되어 마땅치 않은 결말을 바꿔 써보지 않았더라면, 그가 돈키호테로 나서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거쳐 도달한 시작이며 전체의 반. 돈키호테의 모험은 저절로 굴러가는 수레였다. 그가 오래전부터 흠모해온 이웃집 여인은 공주님이 되고, 풍차와 양떼에 맞서고, 슬픈 몰골의 기사에서 사자의 기사로, 스스로 위대해지고 모두가 즐거워지는 모험의 연속.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맛볼 수 없는 고난스럽지만 달콤한 맛.

글을 쓸 때에도, 가장 어려운 것이 첫 문장이라고들 한다. 물론이다. 첫 문장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무얼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니까. 첫 문장을 썼다는 것은 전체의 반에 이르렀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이윽고 첫 문장이 들어서는 순간, 이어서 문장이 문장을 끌고 와 이야기를 굴리는 수레에 올라타게 되니까. 그 맛이 꽤 상쾌하고 신명나기까지 해서, 달리는 줄도 모르고 가게 된다. 모험의 수레를 굴러가게 한 위대한 반의 힘. 하지만 그 반의 동력으로 가는 수레는 반드시 끝의 목전에서 멈추게 되어 있다. 시작과 끝은 서로 다른 동력으로 움직인다. 끝을 위한 끝없는 멈춤 상태.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 구르고 또다시 돌아가기의 무한반복. 글쓰기의 두려움은 결국 시작을 못하는 것의 두려움이 아니라 끝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그렇게 다다른 곳에서 발견한 것은, 너는 결코 모두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라는 인식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하지만 그조차도 끝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이니, 어쨌거나 시작은 해 볼 일이고 끝은 반드시 맺어야 한다.

돈키호테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못내 아쉬웠다. 이렇게 죽게 놔두다니. 죽기 전에, 자신은 이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아니라, 그저 착한 자 알론소 키하노라 말하며, 자신의 모든 모험을 부정하게 만들다니. 이런 허망한 끝이 어디 있는가. 돈 안토니오가 말했듯,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줄 수 있는 이득이 그가 미친 짓을 함으로써 주는 즐거움에 미칠 수 없는 것을, 미친 그가 사라지고 나면 산초의 재미와 익살도 사라지게 되는 것을. 작가는 도대체 왜. 마음이 아팠다. 모험이 끝났다는 아쉬움도 컸지만, 스스로 이루어낸 모든 것을 부정해버린 돈키호테가 밉기까지 했다. 끝을 낸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지 않은가. 자의에 의한 일단 멈춤 상태든, 타의에 의한 중지와 절단 상태든, 됐다 이제, 안녕, 손을 탈탈 털고 나면 그걸로 끝. 이것은 끝이 아니라 결별이다. 이런 끝을 보아서는 안되었다.

돈키호테의 묘비명을 다시 읽었다. “미쳐 살다가 제정신으로 죽은. 죽음이 죽음으로도 그의 목숨을 끝내지 못한.” 무엇일까. 그는 죽은 것일까 죽지 않은 것일까. 그는 정말 자신의 모험을 부정한 걸까 아닌 걸까. 죽은 그는 돈키호테일까 알론소 키하노일까. 무엇이 죽고 무엇이 산 것일까. 이 시작의 끝은 뭘까. 이제는 돈키호테의 모험이 아니라 돈키호테의 죽음을 생각할 때. 끝의 시작을 시작할 때.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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