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누군가 식당으로 나를 찾아왔다. 고등학교 동창이라는데 당최 기억나지 않는 이였다. 그럴 땐 기억 못하는 사람이 일단 죄인이 되는 법. 게다가 손님을 맞는 식당 주인 입장까지 더해지면 영락없이 취조실에 갇힌 죄인 꼴이 된다. 아무리 얘기를 나눠봐도 개인적 추억이 뒤따라오지 않는다면 그다지 친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방증. 그러니 결코 죄를 지었다 할 수 없지 않겠느냐 어깨를 펴며 발뺌을 하려는 순간, 불쑥 질문 하나가 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너 아직도 단무지 좋아하냐? 

나 아직, 단무지, 좋아하냐고? 그러니까 이 질문은, 삼십년 전 내가 단무지를 아주 좋아했고, 그걸 알고 있을 만큼 나와 너는 가까운 사이였고, 또 그걸 증명할 만한 유별난 사건 같은 걸 증거로 쥐고 있다는 뜻?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단무지를 좋아했다고, 내가? 응, 무지하게, 내가 싸온 단무지 반찬 네가 다 먹었잖아. 내가? 그래, 분식집에 가면 또 어쨌게, 쫄면 한 그릇에 단무지를 열 번도 더 달라고 해서 먹었을 걸? 단무지 먹으려고 쫄면 시킨 사람처럼, 너 그래서 분식집 아줌마한테 쫓겨났잖아, 기억 안 나? 

이쯤 되면 취조가 아니라 고문이다. 반찬 빼앗아 먹은 거 미안하다고 사죄해야 할지. 나는 오래전 분식집 진상손님이었습니다 양심선언을 해야 할지. 내가 단무지를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인 데다가, 그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던 분식집 아줌마가 종종 눈을 흘기기도 했었으니, 기억은 안 나지만 기억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단무지는 단무지, 죄는 죄, 너를 기억 못하는 죄까지 뒤집어쓸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해 주었다. 

기억 안 나는데? 그리고 나 단무지 안 좋아해. 아니야 너 진짜 좋아했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어, 그냥 있으면 먹은 거겠지. 진짜 좋아했는데. 아니라니까, 다른 사람하고 헷갈린 거야, 나 단무지 별로야. 

그렇게 쐐기를 박고 돌아섰다. 짧은 승리감 뒤에 깊은 자괴감이 몰아쳤다. 아, 세 번씩이나. 사랑하는 이를 부정한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단무지는 아주 어릴 적 짝사랑의 맛 아니었던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카린에 빙초산을 들이 붓고 샛노란 물을 들였다 해도 맛있는, 어쩌면 그래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를 ‘닥꽝맛’ 몰래 훔쳐보던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면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내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느낌이 들었다. 거짓말하면 혼난다, 찰싹. 바른대로 말해, 찰싹. 아, 맞다 거짓말하면 안되는데, 먹는 걸로 거짓말하면 진짜 혼나는데. 내 생애 가장 많이 맞은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쫀드기 때문이었다. 현란한 형광의 자태를 뽐내던, 날로도 먹고 연탄불에 구워도 먹고 가늘게 찢어도 먹는, 달짝지근한 맛에 쫀득쫀득한 식감에 찬란한 과일 향이며, 먹어서는 안된다는 어머니의 엄포까지, 불량식품의 대명사 쫀드기는 지혜의 열매, 금단의 열매, 유혹의 열매였다. 과자 사 먹어야 해, 쫀드기 같은 건 안돼. 어느 날 내 손에 50원짜리 동전과 함께 올려진 단서 조항. 물론 과자를 사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게에 도착했을 때, 나의 각오와 다짐은 물거품이 되었다. 과자 한 봉지 값이면 쫀드기에 아폴로까지 먹을 수 있는데.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경제적인가. 다른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데. 나라고 못 먹을 게 어디 있겠는가. 엄마가 일일이 확인할 것도 아니고. 그때 나는 정말 지혜롭고 똑똑한 아이였다.

물론 걸리면 끝장이었다. 거짓말 뒤엔 빗자루가 따라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애야 했다. 아껴 먹고 싶은 마음도, 이참에 으스대고 싶은 마음도 참아야 했다. 나는 담벼락에 혼자 숨어 아무도 모르게 쫀드기와 아폴로를 먹어치웠다. 손가락에 달라붙은 것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눈물 나게 맛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쫀드기에서 침 발라 오려낸 코끼리만 아니었어도 완벽히 속일 수 있었다. 쫀드기 안 먹었어. 사실대로 말해, 주머니에 이건 뭔데? 형광 코끼리를 손에 쥔 엄마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간에 포기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인정하면 다시는 내 손에 동전은 쥐여지지 않을 테니까. 나는 끝까지 우겼다. 나도 몰라 그게 왜 거기 들어갔는지. 우기다보니 정말 쫀드기 같은 건 안 먹은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할수록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깟 쫀드기 하나 먹었다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왜 나만 못 먹게 해. 그때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쫀드기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쫀드기는 그냥 불량식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도 지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할 때까지 계속 등짝을 후려쳤다. 나는 그날 정말 많이 맞았다. 엄마도 나도 참 징하게 고집스러웠다. 

최근에 쫀드기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정말 맛이 없었다. 고백하자면 못 먹을 맛이었다. 아무리 추억의 맛이라지만 도대체 무얼 추억해야 할지 모를 맛이었다. 이걸 보호하자고 그렇게 죽기 살기로 거짓말을 했던가. 허망했다. 그런데 나는 또 무얼 위해 단무지를 부정한 걸까. 지금까지도 애정하는 단무지를. 내 모자란 기억력을 보호하기 위해? 기억에도 없는 이의 소상한 추억에 방어하기 위해? 그날 나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여전히 단무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나는 그이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그깟 단무지의 추억으로 나를 옭아매려 하다니. 하지만 그리하여 단무지를 생각하면 그 애까지 생각나게 되었으니, 내 순정한 짝사랑의 맛은 그렇게 변질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천운영 | 소설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