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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깥공기와 함께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아버지가 자는 아이들을 깨웠다. 다들 일어나봐, 아빠가 선물 가져왔지, 어서 입에 물고 불어봐 후후. 얼결에 입에 문 건 멜로디언 마우스피스. 눈도 못 뜬 채 엉거주춤 일어나 앉아 후후 숨을 불어넣는데, 도레미파솔라시 멜로디인지 소음인지, 솔솔라라솔솔미 선물인지 봉변인지, 오빠도 나도 엄마도 멜로디언 하나씩 입에 물고 후후, 한밤중에 난데없이 가족악단이 탄생했다. 아버지는 침을 질질 흘리며 멜로디언을 불다가 호스를 휘휘 돌리면서 악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 이 멜로디언은 다 어디서 난 건가요? 하나 둘 셋, 나오고 또 나오던 멜로디언의 정체. 그것은 아버지가 납품하던 업체에서 돈 대신 받아온 것이었다. 멜로디언 100대. 물품대금으로 받아온 물품. 아버지가 멜로디언을 불며 흘렸던 것이 침만은 아니었으니. 그날 이후 내 사촌들은 멜로디언 하나씩 손에 쥐게 되었고, 한동안 이웃집에서도 멜로디언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공장사람들과 그들의 일가친척들도 그 업체의 멜로디언을 갖게 되면서, 방 한구석을 차지하던 100대의 멜로디언은 차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걸로 얼마의 돈을 건졌는지, 그걸 처분하는데 얼마나 걸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다 처분하고 났을 즈음, 새로운 물품대금이 도착했다는 것뿐.

이번엔 덩치가 좀 컸다. 피아노 두 대. 그것이 집으로 배달되던 날 아버지는 연주를 하지도 침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 비싼 피아노를 사갈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결국 한 대는 집에 두고 한 대는 피아노학원에 헐값에 넘겼다. 아버지 속이 어쨌는지는 상관없이, 나로서는 그런 횡재가 따로 없었다. 멜로디언도 아니고 피아노라니. 부잣집에만 있다는 그 피아노를 내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피아노학원에도 등록했다. 어쩌면 뒤늦게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 도레도레도레도. 연습은 집에 가서 할게요 선생님, 저희 집엔 피아노가 있거든요. 으스대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피아노 수강은 6개월을 넘지 못했다. 내게 음악적 재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을뿐더러, 아버지가 피아노 소리를 지독히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피아노 뚜껑만 열면, 곧바로 시끄럽다는 호통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피아노 소리가 싫었던 게 아니라, 그 소리가 상기시키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물품으로 대금을 지급하던 그 업체는 얼마 후 부도를 내며 도산했고, 그나마 건진 것이 바로 그 피아노였으니, 내가 건반을 누를 때마다 울화가 도돌이표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피아노 앞에 다 같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 같은 건 없었다. 그 피아노는 더 이상 연주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운 비탄의 상징물로, 집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가, 지금은 내 조카가 물려받아 쓰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당시에 물품대금으로 받아온 물건들은 참으로 많았다. 밥솥이나 난로가 10개, 20개씩 올 때도 있었고, 심지어 커다란 활도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납품했던 물건이 어디에 어떻게 박혀 있는지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봐 여기 이거 내가 프레스로 눌러서 모양을 잡은 계기판이야. 이 쇠로 만든 글자가 내가 봉투에 넣어 포장했던 그거야. 처음 멜로디언을 물품대금으로 받았을 때처럼 한밤의 연주는 없었지만, 새로운 물품이 도착할 때면 언제나 서글픈 멜로디언 소리가 들렸다. 자 불어봐 후후, 침인지 눈물인지와 함께 불던 그 비탄의 소리.

문득 그 밤의 멜로디언 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은, 가게 정리를 위해 중고주방업체에 견적을 의뢰했을 때였다. 주방을 돌며 냉장고와 오븐 세척기 라벨을 확인하고 작업대 건조대 등을 휙 둘러본 다음, 3~4분 만에 견적서를 보여줬을 때의 절망감. 돈이 되는 것과 돈이 되지 않는 것, 잘 팔리는 것과 팔 수 없는 것,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경계. 그 물건들이 그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래, 그런 것이지, 당연한 거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밤중에 입에 꽂아 넣던 멜로디언 호스와 침을 흘리며 연주하던 밤이 생각났다.

어쩔 수가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중고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신제품 가격의 50% 이하로 사길 원하잖아요. 이거 가져가면 다 세척하고 손 보고 해서 물건으로 만들어야 되고, 운송비 들어가죠, 인건비 들어가죠, 쓰레기 처리해야 되죠, 그러니까 대략 20%선에서 매입가격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작업대든 테이블이든 규격으로 나온 기성제품은 팔 수 있는데, 맞춤으로 제작한 건 그냥 쓰레기예요,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 의자는 기성제품이니까 되고 이 테이블은 맞춘 거라 안 되고, 예쁘건 고급이건 상관없어요. 이건 저희도 안 가져갑니다, 폐기물수거업체를 따로 부르셔야 해요. 그나마 2년 된 가게라니까 와서 견적이라도 뽑아주지, 3년, 5년 된 가게들은 가지도 않아요. 요즘엔 6개월에서 1년 된 가게들이 많이 나오니까, 거기 다니기도 바쁘죠. 3개월도 허다해요. 2년이면 많이 버티신 거예요.

견적 내용을 상세히 설명해준 업체 사장의 말. 그는 당일 다섯 곳의 폐업 직전의 가게 견적을 내고 왔고, 한 군데 가게 시공을 해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정리하는 사장님들 마음도 이해하겠고, 새로 시작하는 사장님들 마음도 이해하겠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현실인데. 견적을 내는 동안 물건들을 그나마 함부로 대하지 않고, 참 깔끔하게 사용을 잘했다는 말도 덧붙이며, 문을 닫는 업주의 심정까지 헤아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어쩌겠나 그게 현실인걸.

멜로디언의 선율이 울려 퍼진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납품대금으로 받은 물건을 여기저기 중고가격으로 팔아넘겨야만 했던 날들, 그렇게 몇 푼이라도 건져 공장을 유지해야 했던 아버지의 시간. 나에게도 피아노가 생겼다고 신나했던 철부지 어린애는 이렇게 뒤늦게 아버지의 침과 눈물을 이해합니다요.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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