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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검버섯이 생긴 거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 관자놀이 즈음에 난 검은 자국을 꾹 누르며 물었다. 실로 걱정스러운 표정. 검버섯이 아니라 기미인가? 그러면서 검버섯에 준하는 노화의 기미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러다간 화제가 노화와 건강에 대한 것으로 옴팡 넘어가겠군. 그래서 얼른 고개를 돌리며 설명했다. 이건 그러니까 검버섯이 아니라, 전에 고기를 튀기다가 기름이 튀어서 생긴 화상 자국인데, 이게 안 없어지고 점점…. 사연을 채 다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진심 안쓰러운 표정이 되어, 흉터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아이고 식당일이라는 게 그렇지, 이거 다 기름 튀고 그래서 생긴 거지? 어쩜 좋니, 잠깐 기다려봐, 피부과에 가서 레이저 치료라도 받는 게 좋겠지만, 당장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이게 커버력이 꽤 괜찮은 제품이라, 이렇게 톡톡톡 두들기고 문지르면, 자 봐 좀 가려졌지? 그러게 뭐한다고 식당은 해가지고 몸 상하고 얼굴 다치고.

그녀가 검버섯이라 오해했으나 실은 기름에 튄 관자놀이의 화상자국이, 또 사실은 식당을 하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십수년 전에 집에서 혼자 탕수육을 해먹다가 생긴 것임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내 몸 곳곳에 난 흉터들을 보고 만지며 안쓰러워하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흉터의 내력들이 고만고만해서 굳이 설명을 달 필요는 없었다. 다만 색의 농도를 통해 상처의 시기가 대략 가늠될 뿐이었다. 채 아물지 않은 가장 최근의 상처가 강아지 발톱에 의해 난 것이라는 사실도 굳이 밝히지 않았다. 당신이 보고 있는 그 모든 상처와 흉터가, 당신이 상상한 바대로, 어떤 노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마음껏 안쓰러워하시라. 내 팔을 보고 약쟁이 환자 팔뚝 같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으니, 무슨 더한 품평이 나올쏘냐. 훈장 단 가슴을 쭉 내밀 듯, 손가락을 쫙 펴고 팔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는 결국 검버섯 같은 화상자국을 조금쯤 흐리게 만들어 준 그 커버스틱을 내게 선물로 남기고 갔다.

그녀가 돌아가고 난 후 밖으로 나와 혼자 걸었다. 뒷짐을 진 채였다. 흉터에 무덤덤해진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흉터투성이 손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시각을 지우자 촉각이 선명해졌다. 검지와 검지에서 이어지는 손바닥 사이로 새롭게 앉은 굳은살이 느껴졌다. 전보다 두툼해진 손바닥 거죽의 느낌도 선명했다. 데였다가 가라앉고 쓸리고 부대끼면서 만들어낸 굳은살. 손바닥이 아니라 발뒤꿈치를 마주 댄 느낌이었다. 그건 좀 서글픈 일이었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먹어봐야 안다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그래서 무언가를 꼭 손으로 만져보고 느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굳은살 박인 둔감한 손이 되었다는 현실. 내가 만진 누군가의 뺨이 까슬까슬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은 그의 뺨이 아니라 내 손이 거칠어서 생긴 감촉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순간, 나는 얼른 뒷짐을 풀고 손을 탈탈 털어냈다. 에이, 그래도 장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잡아도 전보다 덜 뜨겁게 느껴지고, 구운 파프리카 껍질도 맨손으로 휙휙 까게 되었으니. 걸음을 돌려 짐짓 명랑하게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두 팔을 휘휘 저으며 뛰듯이 걷다가 문득, 친구에게 손바닥의 굳은살도 만지게 해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우유대리점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유 하나를 내밀었다. 새로 출시된, 기간 한정 제품이라고 했다. 오디맛 바나나우유. 맛이나 한번 보라고. 오호 정말 바나나우유가 오디 색이네요. 그렇지? 그 참에 우리는 대리점 앞에 간이 의자를 놓고 나란히 앉아 노닥노닥 수다를 떨었다. 오디맛 바나나우유의 이름에 대해, 인근에 공사 중인 건물에 대해, 공사가 끝나면 더 심각해질 주차난에 대해.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건너편 식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얼마나 됐지? 일년 반이 넘어가네요. 그거밖에 안됐나? 한 삼년쯤 된 거 같은데. 저는 한 십년쯤 된 거 같아요. 때마침 앞집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끌고 도착했다. 대리점 아저씨는 앞집 할아버지에게도 오디맛 우유를 하나 건네주었다. 저기가 생긴 지 이제 일년 반이라네? 대리점 아저씨가 말했다. 그러자 옆집 할아버지가 마침 할 말이 많았었다는 듯 먹던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저 집 차 바꿨대? 털털털털 고물차 끌고 와서 가게를 시작하더니, 훤한 차로 바꿨어 그래. 할아버지는 내가 바로 그 집 주인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상태. 나는 나서지도 못하고 숨지도 못한 채, 속으로 지레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은요, 그 털털털 고물차가 십오년이 되었는데요, 지난번에 운전 중에 갑자기 시동이 꺼지고서는 안 켜져서요, 이러다가 큰 사고 나겠다 싶어서 차를 바꾸긴 바꿔야 했는데요, 중고차를 알아보다가 어쩌구저쩌구, 중고차가 어쩌구 할부금이 어쩌구. 그때 할아버지가 내 속엣말을 차단하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 세상이 좀 그래야지. 가게 열심히 하면 고물차에서 새 차로 바꿀 수 있다. 그래야 좀 살맛이 나지 않겠어? 뭐라도 시작할 수 있는 세상이 돼야지. 아휴 내가 새 차 뽑은 거 같아.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오며가며 만져본다니까.

화나지 않으세요? 여기 맨날 사람들 북적거리고 시끄럽고 주차까지. 내가 물었다. 할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그렇게 살지 마. 마음을 그렇게 나쁘게 먹으면 못 쓰는 거야. 사촌이 땅 사면 왜 배가 아파, 같이 기뻐해야지. 그 속담 바꿔야 돼. 사촌이 땅 사면 콩고물이 떨어진다. 콩고물이 아니어도 얼마나 즐거워. 즐거운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나도 즐겁지. 찡찡거리는 사람 옆에 있으면 즐거워? 안 그래? 아가씨도 마음 좋게 먹어야 해. 그래야 성공하는 거야, 알아? 네네, 저도 즐거워요, 저 차 참 멋지네요. 우유대리점 아저씨는 옆에서 그저 허허허 웃었다. 기분이 참말로 좋았다. 아가씨란 말도 듣기 좋았고, 즐거운 사람 옆에서 즐거워지는 느낌도 과연 좋았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내가 친구에게 보여준 것과 숨긴 것에 대해. 그 징징거림에 대해. 배 아플까봐 설레발치는 사촌의 마음에 대해.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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