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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가 보았다. 골목에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걸 보니. 건너편 건물 지하에 있는 교회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목소리의 질감을 고려했을 때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인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굳이, 이 와중에, 기어이. 분노보다 공포가 먼저 엄습했다. 노랫소리에 공포라니. 공포 두려움 위축, 분노는 뒤늦게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이 호흡하는 공기에서 최대한 떨어지는 것. 내 안전한 공간으로 피신해 숨어 있는 것.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으니 굴욕감이 공포를 대신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내 면전에 침을 뱉은 것 같았다. 침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두려워졌다. 대체 *이것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란 말인가.(*문장은 브레히트의 시 ‘이후에 태어난 자들을 위하여’가 인용한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제목 ‘이것은 어떤 종류의 시대란 말인가’를 변형한 것임) 

3월 한 달은 거의 방에서 지냈다. 부득이한 볼일을 제외하고는 외출을 삼갔다. 약속들은 거의 다음 달로 미루어 두었다. 자발적 격리 상태는 종종 있는 일인 데다, 어차피 마쳐야 할 마감도 있었고, 미처 풀지 못한 짐들도 잔뜩 쌓여 있었으므로, 물리적 거리 두기는 아주 모범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고 진척은 바쁜 와중만큼을 따라가지 못했고, 격리가 아니라 감금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때때로 억울하고 숨이 막혔다. 그리하여 어쩌다 보니 지난 한 달 내내 방 하나를 온전한 집으로 구성하는 데 매진하게 되고 말았는데, 가지고 있는 것들은 우선순위를 매겨 제거해 나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생각해 보지도 못한 낯선 물건들을 찾아 들이느라 우왕좌왕했다. 빼고 빼도 넘쳐났고, 더하고 더해도 필요한 무언가가 생겨났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한 것인지, 방이란 무엇이고 집이란 무엇이고 장소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떤 방에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아버렸다 

우리의 목구멍에서 나와야 할 

소리는 찬송이 아니라 

결기의 목소리다


방.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해 벽이나 칸막이로 막아 조성한 내부 공간. 들고 나기 위한 문과 채광 환기를 위한 창이 설치된 독립된 공간. 

최초의 방은 불을 들이는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불을 지펴 추위를 피하고 요리를 해 먹고, 불을 중심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충 쓰러져서 자고. 난방과 취사가 가능한 부엌이자 거실이자 침실인 안전한 하나의 공간. 

이제 보통의 주거공간에서 방이란 취침이나 휴식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을 의미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하나의 방이자 주거공간을 획득했다. 여성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였던가. 

그런데 나는 언제 처음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나. 아마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틈만 나면 계단을 타고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아지트 같은 곳. 다락방. 그곳에는 쿠오바디스나 목로주점 같은 책들이 쌓여 있고, 아버지와 엄마의 결혼식 사진이 든 앨범이 있고, 고개 하나 겨우 내밀 수 있는 창으로 이웃집 부엌이나 마당을 훔쳐볼 수도 있었다. 그곳은 내게 은신처이자 놀이터였고, 기록보관소이자 도서관이었고, 창고이자 전망대였다. 그곳에 있으면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곰곰 생각해 보면, 가족을 피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부재를 잊기 위해 그곳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 몇 걸음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누군가와 함께할 것이 보장되므로, 그곳은 고립이 아니라 고유한 장소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방들이 존재한다. 사용하는 주체와 형식과 용도에 따라, 안방 건넛방 사랑방 셋방 다락방 옥탑방 빨래방 노래방 찜질방, 심지어 방탈출방까지. 어떤 방들은 따스하고 어떤 방들은 선언적이고 어떤 방들은 유용하고 또 어떤 방들은 문제적이다. 

방은 이제 더 이상 벽과 천장과 문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떤 방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아버렸다. 이것은 대체 어떤 종류의 세상이냐, 라며 눈 질끈 감고 저마다의 방으로 도망갈 일이 아니다. 

여기서 느껴야 할 것은 공포가 아니라 분노.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는 브레히트의 고백처럼, 범죄에 대한 침묵 또한 범죄나 다름없다는 브레히트의 자기반성처럼, 그리고 이런 시대에는 조금이라도 듣게 하는 것 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처럼. 우리의 목구멍에서 나와야 할 소리는 찬송이 아니다. 이후에 태어난 자들을 위한 결기의 목소리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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