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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30일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성착취 영상이 유포된 텔레그램 n번방 관련자 전원의 처벌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명 ‘박사방’ 운영자 검거와 ‘n번방’ 성착취 사건이 알려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멘털이 무너지고’ ‘잠을 잘 수가 없다’ 한다. 충격은 컸고 분노는 관련 국민청원의 사상 최다 동의로 표출되었다. ‘n번방’ 얘기로 온·오프라인이 뜨거웠고 여론을 의식한 국회, 청와대, 정당, 법무·검찰, 법원까지 앞다투어 대책을 내놓고 있다. 

맘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빠르게’도 중요하지만 절박함과 다급함에 쫓겨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모든 범죄자에 대한 분명한 처벌과 피해자 지원 등 당연한 눈앞의 대책 외에 우리 사회는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지, 공동체 가치와 원리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n번방 성착취 범죄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 기제와 공론화 과정에서 떠오른 핵심 키워드는 일치한다. n번방 성착취의 시작은 불법 취득한 개인정보와 성적 이미지였다. 가해자는 여성의 성적 행동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작동 방식, 피해자의 공포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 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건 공론화 이후 국민청원의 내용은 ‘가해자 신상정보 공개’였고 일탈계, 조건만남 등 피해자를 탓하는 얘기도 어김없이 나왔다.

피해자를 탓하고 피해자에게 주목하는 것은 철저히 가해자 중심 서사다. 모든 사람은 결함이 있다. 피해자도 그중 한 명일 뿐이다.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강조도 피해자를 구분, 피해자의 결함 여부를 따지는 맥락에서 같은 말이다. 폭력은 ‘누가’ 당했는지 관계없이 폭력일 뿐이다. 피해자에게 주목하는 가해자 중심 서사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범죄를 ‘축소’하고 ‘정당화’한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위축시키는 담론은 이 사건의 피해자는 물론 여성들이 폭력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게 만든다. 제2, 제3의 n번방 사건, 무수한 성폭력범죄를 가능케 하는 자양분이 될 뿐이다. 

많은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경찰은 공식 절차를 통해 신상공개를 결정했다. 그러나 하루 전날 ‘국민의 알권리’를 내걸고 SBS가 단독 보도했고 이후 가해자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겨 영원히 사회적 낙인을 찍어버리겠다는 집단이 나타나 수백명에 이르는 가해자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가해자의 협박 무기였던 ‘신상공개’가 ‘공익’과 ‘처벌’의 수단이 되었다. 사적 구제방식까지 등장한 현실에서 우리 사회는 앞으로 ‘신상공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폭력’의 방식으로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무엇이 폭력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회가 폭력을 만든다. 여성시민권 관점에서 ‘폭력’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한다. 국가도 언론도 ‘폭력’에 자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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