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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의 훈련소 퇴소식에 다녀왔다. 할머니는 손자 먹이겠다고 불고기를 재우고 김치를 새로 담그고 불고기 불판에 가스버너까지 챙겨왔고, 엄마는 자식 좋아하는 잡채며 나물이며 전을 지지고 무치고 볶느라 잠을 설쳤으며, 한 송이에 몇 만원 한다는 포도를 비롯해 온갖 과일에 평소 즐겨 먹던 과자에 라면까지 완벽준비. 여기에 조카를 끔찍이 여기는 고모는 전날 사다 놓은 딸기생크림 케이크가 어쩐지 미진해 보여, 마감을 코앞에 둔 와중에도 자판을 두들기다가 틈틈이 주방으로 가 토마토스튜를 젓고 있으니, 이게 웬 수선이고 난리고 법석이냐 싶기도 했지만, 군대 간 자식 생각하는 마음표현에 먹을거리 말고 다른 게 없었으므로, 논산으로 출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뭐 더 가지고 갈 만한 게 없을까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군대 간 자식 생각하는 마음 표현에

먹을거리 말고 다른 게 없었으므로

불고기에 온갖 과일까지 완벽준비


퇴소식은 실내체육관에서 진행되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청년의 얼굴을 보겠다고 일찌감치 들어가 착석. 이윽고 훈련병들이 열을 맞춰 등장했을 때, 여기저기 손짓하고 환호하고 영상을 찍으며, 누구야 여기 좀 봐라 누가 왔다, 누구야 멋지다 근사하다 사랑한다, 흡사 무슨 행사 퍼레이드에 참가한 분위기였는데, 그 와중에 나란 사람은, 군인을 보면 뒤에 아저씨가 붙었었는데 언제부터 군인이 뽀송뽀송한 아이로 보이게 된 걸까, 내가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씁쓸한 세월을 향해 눈을 흘기며 서 있었지만, 행사를 마치고 쉰 목소리로 경례를 붙이는 조카 앞에서는 기어이 눈물을 보이기도 했더랬다. 

우리는 예약해둔 펜션으로 가서 준비해온 음식을 먹었다. 소파에 느긋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먹고 마시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청년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는 것은 기본이고, 침대 방에서 잠깐 낮잠을 재우고 난 다음, 다시 일어나 먹고 마시고, 마지막으로 뜨끈한 물로 목욕을 한 다음 핸드드립 커피까지 내려서 디저트 타임. 요즘엔 다들 그렇게 한다고 했다. 집 같은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준비해온 음식은 물론이고 피자며 치킨이며 햄버거 같은 것이 시간차를 두고 배달. 사나흘을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청년은 질려 하지도 않고 맛있게 먹었다. 군대에서 못 먹이는 것도 아닌데, 못 먹어봐야 몇 달이었을 텐데. 군대 오기 전 고모랑 먹었던 청어우동 맛이 생각난다는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세월이 바뀌어도 군대는 군대인가보다 했다. 청년의 아버지는 생전 안 먹던 약과가 군대 가니 그렇게 먹고 싶었다 했고, 청년의 할아버지는 논에서 잡아 구워 먹은 개구리 맛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초코파이에서 김칫국으로 정부미에서 꿀꿀이죽으로 왔다갔다 하더니, 그땐 얼마나 추웠고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지금 군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버지의 1980년대 군 생활이 소환되더니, 어디다 비교하겠느냐 베트남 파병이니 꿀꿀이죽이니 동상 걸린 발이니 할아버지의 60년대 군대에까지 가닿고 말았으니, 과연 군대 얘기야말로 나 때는 말이야의 최고봉임에 틀림이 없었다.


못 먹어봐야 고작 몇 달이었을 텐데

질려하지도 않고 맛있게 먹는다

세월 바뀌어도 군대는 군대인가보다


나로서는 그저 여자 사촌들과 함께 먹을거리들을 잔뜩 사들고 오라비 부대에 면회 간 날의 풍경 정도로 나 때의 맛을 더할 뿐. 그러다 생각난 것이 대학동기 녀석의 훈련소 입소식 때 먹은 의정부 부대찌개였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누구와 함께 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먹었던 부대찌개만큼은 비교불가 최고였다고 단언할 수는 있었다. 그날은 유독 추운 날이었고, 유독 배가 고팠고, 유독 가진 돈이 없었다. 모은 돈은 아마도 전날 환송회 술값으로 탕진했을 것이고, 추운 날 해장도 못한 채 의정부까지 몰려왔을 테니, 입대자는 얼른 들어가봐라 우리는 어디 가서 해장이나 해야겠다 밀어 넣고는, 의정부에 왔으면 부대찌개를 먹어야지 예닐곱 명이 식당으로 들어가 가진 돈 탈탈 털어 가늠해보니 가까스로 4인분. 눈치고 염치고 간에 일단 시켜놓고 육수에 라면사리를 계속 추가해가며 먹었으니, 어찌 맛이 없을 수 있을쏘냐. 내게 훈련소 맛은 바로 그것이었다. 모자란 의정부 부대찌개의 맛.  

그렇게 한나절의 달콤한 휴식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할 시간이 되었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판이었지만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으니. PX. 달팽이크림이야 홍삼이야, 그 소문난 마스크 팩이 이렇게 싸다니, 선물할 거 나눠줄 거 내가 쓸 거, 이때만큼은 훈련병 가족 친구 애인이 아니라 보따리상 소리를 들어도 좋다, 이게 바로 훈련소 퇴소식의 맛이로구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장바구니를 채웠다. 논산에서 돌아오는 길, 그래도 얼굴 보고 나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생각하면서, 아무래도 조카 면회를 자주 가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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