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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씁니다. 식당을 하는 동안 응원의 편지를 보내주었던 한 재소자에게 보내는, 뒤늦은 답장입니다. 다른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이보다 더 좋은 방도가 없어서요. 식당을 연 것이 알려지고 감옥의 재소자들로부터 꽤 많은 편지를 받았는데, 새로운 시도와 출발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개중에는 그곳으로 돈이나 책을 보내달라거나, 언제 출소할 예정이니 도움을 달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20년 전, 문신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써서 소설가가 되었을 때, 그 비슷한 편지들을 받기는 했네요. 자신의 몸에도 문신이 있다, 왜 자꾸 문신을 하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편견을 뚫고 잘 살아보겠다, 대략 그런 내용들. 

식당은 정리를 했습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부디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 여행도 다니며 편히 소설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하셨는데. 바라는 성공은 아닌 듯합니다. 폐업의 절차를 밟는 일은 꽤 쓰라린 일이었습니다. 애지중지 사용하던 주방 기재와 용품들이 헐값에 실려가는 걸 지켜보고, 가스배관은 연장한 만큼 철거비도 더 든다는 사소한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고 퇴직금 탈탈 털어 시작한 일이었다면, 극단적인 결심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허망했습니다. 그래도 내겐 돌아갈 곳이 있으니, 다 잃고 빈손이 되어도 받아줄 내 든든한 뒷배, 소설. 차라리 홀가분하기도 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봇물처럼 터져나올 줄 알았지요, 글이. 육체노동을 줄이고 시간이 확보되면, 그동안 차곡차곡 담아두었던 이야깃거리들이, 좔좔좔 흘러내릴 줄 알았지요. 그런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그것도 가장 구석진 곳으로 기어들어가, 책이나 읽으며 지냈습니다. 자판에 손을 얹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왔습니다. 길을 잃었고 말을 잃었습니다. 다시 쓸 수 있을까. 이러다가 소설마저 폐업하게 되는 건 아닌가. 그럼 다시 식당을 해야 하나, 이제 식당이 뒷배란 말인가?    

그러다가 당신의 편지를 다시 꺼내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식당을 하는 동안에는 여유가 없어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날씨와 안부와 다짐과 후회와 응원으로 이루어진 빤한 편지로 치부했는지도.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써서 보내는 당신이 참 대견하기는 했습니다. 편지는 대략 30여통이 되더군요. 펼쳐놓고 보니 제법 많은 분량입니다. 시간 순서대로 정리를 한 다음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감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편지를 쓸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주 일요일 편지를 썼습니다. 분노와 원망을 다스리기 위해 어떤 명상들을 하고 있는지, 어떤 위기가 있었고 어떻게 흔들렸고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에 대해 썼습니다. 식당에 대한 걱정과 충고, 기도와 응원도 빠지지 않았지요. 고맙습니다. 그곳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써 보겠다는 다짐도 있었지요. 

매주 일요일 날짜가 찍혀 있던 편지가 2주, 한 달로 간격을 벌리더니, 작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간격이 벌어진 기간의 편지에서 위기가 감지됐습니다. 편지나 일기를 쓸 수 없게 만드는 감옥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일기를 쓴 지 오래되었다며 다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도 했습니다. 

최근에 <다시 쓸 수 있을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다가 77세에 이르러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 어느 작가의 에세이입니다. 40여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다 하는데, 번역 출간된 작품이 없어 정작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낯선 작가임에도 덥석 집어 들고 읽게 된 것은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명치가 저려오는 바로 그 질문.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도, 글을 써왔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해왔을 질문. 다시 쓸 수 있을까. 노작가의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로 시작해 “마지막 말은 모국어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 작가는 새 출발의 언어를 발견한 듯합니다. 모국어. 모국어와 상용어가 따로 분리되지 않은 나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40여권이나 써왔으면 그만 써도 되는 게 아닌가 싶던 차에, 조금 맥 빠지는 종착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앞의 문장 “말할 것이 있으면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할 수 있다”를 마지막 문장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해졌습니다. 후지게 쓸까봐. 잘 쓰지 못할까봐. 새로운 인생이 없을까봐. 두려웠던 겁니다. 

노작가의 책이 아니라 다시 펼쳐본 당신의 편지 덕분에 알았습니다. 가 닿았는지 확인할 수도 없고 응답도 없지만, 지치지 않고 묵묵히 써내려간 글들. 어떤 작가보다 용감하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그 속에서 당신은 자유였습니다. 그러니 부디 글 쓰는 일을 멈추지 마세요. 저도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아예 쓰지 않느니 후지게라도 쓰겠습니다. 쓰고 있지 않는 동안에는 그곳이 어디든 감옥 같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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