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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철학자
생계가 심각한 위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이기적으로 변한다. 아니 변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니까. 이럴 때 우리는 생존 경쟁에 뛰어든 짐승으로 변하고 만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과 가져야 할 것에 연연하는 순간, 우리는 보수적으로 변하고 만다. 왜냐고. 보수주의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강력한 소유의 의지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가 기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치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불행히도 사랑이 사라질 때, 우리는 인간에서 짐승으로 변신한다. 모든 것을 절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때, 어떻게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는 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타인에게 건네줄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사랑이 없다면, 과연 인간에게 사회는 가능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일이다.
1998년 외환위기 사태와 그로부터 강력하게 대두한 신자유주의라는 이념만큼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인간을 아프게 할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었던 것도 없다. 자본의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인간이 아니라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제 인간마저도 그가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자본의 양으로 평가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니 달려야만 한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자본을 가지려는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해묵은 당근과 채찍의 전략을 다시 꺼내들었던 것이다. 경쟁에서 이긴 극소수의 사람이나 간신히 커트라인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당근을 제공했고, 불행히도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는 실직과 실업이라는 매서운 채찍을 휘둘렀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경쟁 논리는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서 자신을 사랑하거나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참혹한 삶의 조건에서 한때 사랑의 결실로 칭송되던 아이들도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행복도 생존에 불리하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지속될수록 출산율이 저하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인간의 반응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존에 더 이상 도움이 되는 존재라기보다는 생존율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진 것이다. 당연히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만큼 상대적으로 장년과 노년층이 늘어나게 되었다. ‘고령화 사회’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고령화 사회가 결코 바람직한 사회일 수는 없다. 생존만을 걱정하면서 삶을 영위했던 결과이기도 하지만, 고령화가 가중될수록 전체 사회 성원들은 더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노인들도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고령화 사회는 표면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고령화 사회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에 강제한 서글픈 파국이니까. 10년 동안 이루어진 상처는 최소 10년 이상은 어루만져야 치유되는 법이다. 그러니 고령화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하려는 정부의 여러 정책들은 일순간적인 마취제라면 모를까, 근본적인 해법일 리 없다. 더 가혹하게 말한다면, 정부의 정책은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하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경쟁 사회를 조장하고 강화하는 데 일조한 정부가 과연 출산율과 고령화의 문제를 걱정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진짜 개도 웃을 일 아닌가.
명심하자.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와 그것을 옹호하는 정부가 고령화 사회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고령화 사회를 교묘하게 다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가와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령화 사회를 우려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두구육(羊頭狗肉)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 아닌가. 도처에 전개되는 상업 광고와 정치 선전을 보라. 외롭게 죽어갈 수도 있다고 두려워하고 동시에 남은 가족들을 걱정하는 노인들을 유혹하는 수많은 보험 광고가 우리 눈에 들어올 것이다. 또한 노인쉼터나 노인복지센터 등 노인들의 복지를 약속하며 그들로부터 표를 구걸하는 정당의 화려한 제스처도 눈에 쉽게 띈다.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자본가와 정치가들의 동물적 감각이 말이다. 고기와 내장도 다 빼내먹고, 이제 뼈까지도 우려먹겠다는 형국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어떻게 하면 고령화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의문을 제대로 풀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개인을 생존 경쟁이 아니라 사랑의 가치에 눈뜨도록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공동체의 작동 원리는 성원들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원초적인 사실을 깊게 자각해야만 한다. 남태평양의 어느 부족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GDP와 GNP에서는 우리와 전혀 경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들은 남루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보다 더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서 싸운 어부 한 명이 그 결실을 가지고 해변에 이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부족 사람들은 그에게 달려온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 없는 노인도, 그리고 바다에 나가기에 너무나 어린 소년도 그 속에 섞여 있다. 그렇지만 아무런 미안한 마음도 없이 그들은 어부에게서 물고기를 받아간다. 놀라운 것은 어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고기를 웃으면서 나누어준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어부로부터 물고기를 나누어받은 노인들도 한때는 젊었었다. 당시 그들도 지금은 건장한 어부로 자란 어린 소년에게 물고기를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물고기를 받은 소년들도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되어 있을 어부에게 물고기를 나누어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원리가 노인과 소년의 삶을 궁핍하지 않도록 했으며, 그들의 얼굴에 신뢰와 애정의 미소를 깃들게 만든 것이다. 이 부족 성원들 중 그 누가 아이 낳기를 두려워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아이는 나만의 아이가 아니라 공동체 성원 전체의 아이니까 말이다. 물론 지금 자신에게 물고기를 받은 소년이 장성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신이 괜히 물고기를 나누어주었다고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랑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어떻게 경쟁에 지쳐 자살하는 젊은이나, 혹은 노숙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고령화 사회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래된 미래가 있다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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