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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철학자


얼마 전 김수영에 대한 10주 강의가 끝났다. 모든 강의가 그렇듯 어쩔 수 없이 내 강의도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말하고 제자는 듣는 식으로 강의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의 도중 나는 종종 티타임을 제자들과 갖는다. 이런 때 나는 스님들의 묵언수행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중생에 대한 사랑을 서약한 스님은 중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듣기 위해 우리는 침묵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내 쪽에서 소음을 내지 않아야 상대방의 소리가 들릴 수 있는 법이니까. 소통은 바로 침묵에의 의지 속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선생은 제자에 대해, 부모는 자식에 대해, 정치가는 국민에 대해, 선배는 후배에 대해, 먼저 묵언수행의 교훈, 침묵의 지혜를 배울 일이다.

지금 우리는 소통하자는 외침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고대중국의 철학자 노자가 말했듯이 충효의 가치가 부각되는 시대는 사실 불효와 불충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통의 외침이 주로 힘 있는 자들, 그러니까 정치가나 최고경영자들의 입에서 울려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소통은 힘 있는 자들의 입에서 발화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 소통하자는 이야기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대통령이 하급관료를 불러 소통하자고 할 때, 혹은 아버지가 자식을 불러 소통하자고 할 때, 관료나 자식이 느낄 압박감은 명약관화하다.

야자타임이란 것이 있다. 나이나 지위가 같다고 상정하고 후배들이 편하게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는 자리다. 직장 상사나 학교 선배가 후배들과 소통하려고 벌이는 일종의 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야자타임은 후배들을 더 경직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후배들은 야자타임을 자신들의 속내를 캐려는 선배들의 책략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긴 어느 후배가 “야, 인마 너는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쁘니. 그러고도 네가 사장이냐!”라고 이야기하겠는가. 똑똑한 후배라면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네가 사장이었다면 나는 기꺼이 네 회사에 취업할 거야!” 야자타임만이 아니다. 소통을 위한 각종 모임도 별다른 결실 없이 변죽만 울리기 쉬우니까. 대체 소통하려는 의도가 번번이 좌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을 포함한 사회지도층 인사 대부분은 소통 자체가 목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 그들은 한 번도 소통의 숨겨진 목적을 고민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소통은 사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도 없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목적이고 소통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의지가 없을 때, 소통을 꿈꾸는 일체의 제스처가 상대방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후배가 이혼으로 힘들어 할 때, 선배는 소통의 모임으로 마련된 회식 자리를 취소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 아닌가. 반면 남편이 피곤해할 때, 그를 깨워 대화를 시도하는 부인은 지금 소통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학교에서 제자들이 죽어 가는데, 귀를 막고 있는 총장이 한 사람 있다. 그는 비록 극단적인 형식일지라도 자살이 제자들이 건네는 절박한 하소연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하긴 경쟁이야말로 과학기술 발전의 동력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념의 대변자이니, 그에게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애초부터 어불성설인지도 모를 일이다. 놀랍게도 그도 소통에 대한 강조를 게을리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지나친 경쟁으로 인간과 과학에 대한 애정을 잃어가는 제자들의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외친 소통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레토릭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제자를 사랑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체제 발전의 프로파간다로 전락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러스트ㅣ 김상민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것, 혹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말하라고 강제하는 것. 이것은 소통하려는 애정도 없으면서 소통의 제스처만을 취하는 것이다. 이보다 소통에 대한 더 큰 배신행위가 있을까. 자신이 내려는 소리를 타인으로부터 들으려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교묘한 고문 행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념이나 기득권마저도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감히 소통을 입에 올려서도 안된다. 상대방이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내려놓을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소통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소통이란 한자에도 예견돼 있었던 것 아닐까. 소통(疏通)은 무엇인가 막힌 것을 터버린다는 ‘소(疏)’라는 글자와, 타자와 연결된다는 의미를 가진 ‘통(通)’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 소통의 정신은 연결된다는 의미의 ‘통’이라는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소’라는 글자에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도 신자유주의적 신념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카이스트 총장도 자신의 교육 정책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정치인들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판단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부모도 아이의 행복을 미리 알고 있다는 확신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단지 자신을 내려놓지 않은 소통은 자신의 신념, 생각, 판단, 확신만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려는 폭력으로 바로 변질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나 무서운 일 아닌가. 타자와 연결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타자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제자들과의 티타임 자리에서 나는 가급적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말하는 순간 제자들은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 강의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위험도 충분히 감내할 각오를 다지고 있어야만 한다. 선생으로서의 나의 기득권을 버릴 각오가 없었다면, 티타임 자리는 만들 필요도 없을 테니까. 티타임 자리는 사랑과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티타임을 마무리하면서 나의 뇌리에는 다시 한번 묵언수행의 교훈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침묵하라! 오직 그럴 때에만 당신의 귀에는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자신을 버려라! 오직 그럴 때에만 당신보다 지위나 학식이 열등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릴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첫걸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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