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강신주 | 철학자
신자유주의로 표방되는 현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나 깊고 광범위하다. 신자유주의란 자본가의 자유, 그러니까 결국은 자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이념이다. 당연히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은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본 성장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 혹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렇다. 신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의 성장이지 결코 인간의 행복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자본의 성장이 우리 인간의 행복을 약속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해 “빵이 커지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빵이 커지도록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원리로 경쟁을 제안했다.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었다. 빵이 커져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지금 빵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을 말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작은 빵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다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했으니까. 어리석음의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내건 경쟁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생존경쟁이란 콜로세움에 뛰어들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용케 승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한 일이다. 이제는 빵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틈도, 그리고 빵을 나누자고 주장할 여력도 없다. 그저 검투 경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명령에 충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고민하는 것도 일종의 사치일지 모를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기만 때문일 수도, 아니면 우리의 무지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 결국 생존도 버거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자신 이외의 타인의 삶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을 꿈꿀 리 만무하다. 바로 이럴 때 파시즘의 유혹이 시작된다. 스스로 공동체의 미래를 꿈꿀 여력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대신 꿈을 꾸어주겠다고 나타난 형국이다. 이것이 파시즘이다. 위로부터의 구원의 약속, 다시 말해 “나만 따르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위로부터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생존이 위태로운 사람들 중 그 누가 이런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니 타인의 힘으로라도 구원받으려는 것은 당연한 반응 아닌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았던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복음에 열광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생존이 불안정할수록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 외부로부터 달콤한 구원의 목소리가 자꾸 들려올 테니까 말이다.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혼미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꿈을 꾸지 못하고 타인의 꿈을 나의 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허영 때문일까. 스스로 주인이라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숨기려고 한다. 마침내 마르크스도 말했던 기묘한 전도 현상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에 대해 신하로서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하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위대한 인문정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스스로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를 일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스스로 꿈을 꾸지 못하고
타인의 꿈을 나의 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태어날 때 말했다고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 세상 오직 자신만이 홀로 존귀하다고 기염을 토한 것이다. 편협한 사람이라면 싯다르타가 자기만 귀하고 다른 사람들은 비천하다는 오만불손한 선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싯다르타가 원했던 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절대적인 존귀함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임종을 앞둔 싯다르타의 유언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스승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방향타를 상실할까 두려워했던 제자들에게 남긴 사자후였다. 싯다르타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자기 자신만의 당당한 삶, 그러니까 독존과 자유의 삶을 영위하라고 평생 가르쳤지만, 제자라는 것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는커녕 스승을 모방하며 살려고 했으니까 말이다.
싯다르타만인가. 서양의 가장 강력했던 인문정신의 소유자 니체도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신이 죽었다는 선언은 사실 이제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하며 살아야만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신의 역사가 이제 인간의 역사로 바뀐 것이라고나 할까. 신이 세계에 부여한 의미를 찾아서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제 스스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나를 잃고서 너희 자신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모두 부인했을 때에만 비로소 나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신봉하지 말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때, 모든 사람은 차라투스트라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놀랍기만 하다. 모든 사람이 독존의 자유를 얻으라고 강조했던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 모든 사람이 차라투스트라가 될 수 있다는 니체의 가르침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으니까.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이 두 가지 가르침이 하나의 죽비 소리로 우리의 구부러진 등을 내려치고 있지 않은가! 외부로부터 삶의 지침을 찾으려는 우리의 나약함을 가차 없이 질타하여 구부러진 몸을 당당히 펴라고 말이다. 외부는 군주나 부모, 선생 등과 같은 인격일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 자본, 혹은 신과 같은 무형의 존재일 수도 있다. 외적인 권위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낼 수밖에 없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렇지만 이런 불행은 더 큰 비극의 서막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할 때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현대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가르침을 상기하자. 전쟁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억압적인 체제가 지배를 관철하려는 장소는 우리의 내면이다. 당연히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할 장소도 우리의 내면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은 어떤지 보라.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멘토들의 판단과 생각에 열광하고 있다. 더 이상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보다 멘토들의 생각과 판단이 더 탁월하다는 군색한 변명은 하지 말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위한 멘토가 되지 못하고 멘토를 찾아헤맬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파시즘이란 괴물을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제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그나마 간신히 자유와 민주주의의 꿈이 허락될 수 있을 테니까.
'=====지난 칼럼===== > 강신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당신은 감정을 지킬 힘이 있는가 (0) | 2012.07.22 |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지금 우린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 (0) | 2012.07.09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고령화 사회를 만든 주범은 누구인가 (0) | 2012.06.10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진정한 소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0) | 2012.05.27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진보의 생명은 타인에 대한 사랑 (2) | 2012.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