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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끔 철학적인 고민에 빠지곤 한다. 한숨을 쉬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자도 당혹감을 느낄 만한 질문이다. 그렇지만 대답하기 힘들 것만 같은 이런 난문도 형식만 조금 바꾸면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다.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사랑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좋고,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도 좋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쉽게 자살을 결정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생을 마감하려고 옥상 난간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려보자. 순간 뇌리에 자신이 사랑하거나 혹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그는 결코 난간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람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한두 마리 금붕어도 좋고, 아니면 작은 화초라도 좋다. 금붕어나 화초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혹은 물을 주어야 하니까. 불행히도 평생의 반려자를 잃어버린 사람이거나 아니면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애완견이나 화초를 가까이 하게 된다. 비록 인간이 아닐지라도 그것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밀란 쿤데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그렇다. 자살에 이를 정도로 삶이 가벼워졌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무겁게 만들 수 있는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야만 한다. 


예수도, 마르크스도, 그리고 우리 시인 김수영도 한결같이 사랑이 충만한 사회를 꿈꾸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려는 그들이 어떻게 사랑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자,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여리디여린 우리 아이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상처받기 쉬운 만큼 더 넓고 더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만 과연 지금 우리 아이들은 행복을 느낄 만큼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는가? 아니다. 행복은커녕 우리 아이들은 폭력과 자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여기서 자살이나 폭력을 구분할 필요는 전혀 없다.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니까. 



일러스트 _ 김상민





자살이나 폭력은 모두 사랑이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동일한 원인의 상이한 결과물일 뿐이다.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앗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폭력이나 자살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미움일 수밖에 없다. 우리 소중한 아이들, 언젠가 앞으로 태어날 인간들을 돌보아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진 그들이 점점 인간이라는 사실을 혐오하고,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미움을 쌓아가고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가 가벼워진 것이다. 


언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해답의 실마리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는 선착순과 관련된 참담한 기억으로 충분할 것 같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고등학교 교련이나 체육 수업에서 내가 온몸으로 배운 것은 선착순이 가진 냉엄한 경쟁 논리였다. 50명이 넘는 우리 반 학생들은 너무 우정이 깊었던 것일까. 교련이나 체육 선생님은 선착순을 통해 우리의 우정을 와해시켜서 일사불란한 교정 질서를 세우려고 했다. 경험해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가장 먼저 골대를 돌고 돌아온 학생은 선착순에서 열외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골대 사이를 다시 뛰어야만 한다. 또다시 한 명이 선착순에서 열외가 된다. 서로 친했던 우리의 내면에 조금씩 악마가 들어오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친구들을 이겨 선착순에서 열외가 되어야 한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들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경쟁과 불신의 관계로 변모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교련이나 체육 선생님이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려고 했던 것은 바로 경쟁과 불신이었던 것이다. 1등을 한 친구는 선착순에서 열외가 되고 나머지 우리들은 다시 운동장을 뛰어야만 했다. 1등을 한 친구는 우리들이 뛰는 것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고, 우리도 그를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온몸이 땀에 범벅이 되어 교실로 향하는 길은 서로 너무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의 틈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외로워지는 길을 강요당한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선착순의 추억을 암울했던 독재의 잔재라고 가볍게 치부하지 말자. 1등에게 모든 혜택을 제공하는 경쟁 교육도 기본적으로 선착순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으니까. 1등한 아이만 학교에서, 혹은 가정에서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된다. 


뛰어야 한다.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도 없다. 이런 사회가 지속된다면, 우리 아이들은 사랑의 가치를 점점 더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등수가 떨어지기라도 해보라. 1등을 하던 아이는 1등을 놓친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대신 1등을 차지한 아이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1등을 염두에 둘 수도 없는 아이들은 또 어떤가? 그들도 결코 사랑과 관심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삶의 이유이자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무거워지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연예인이 되어서 한방에 모든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는 야망을 품는 학생도 생긴다. 사랑이 아니라면 관심이라도 받아야만 한다. 폭주족 등 불량한 학생이 되거나, 아니면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이 되어도 좋다. 


누가 우리 아이들을 경쟁과 불신에 물들여 끝내 자살과 폭력으로 내몰고 있는가? 국가의 경쟁력을 위해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 인간보다는 자본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 미래 후손들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바로 현정권과 그 비호세력들 아닌가. 그러니 자살과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제스처는 개도 웃을 일이다. 경쟁의 논리를 버리지 않는 정부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사랑을 되찾아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껏 정부가 생색을 내며 내놓은 대책, 즉 치밀한 사전예방과 단호한 형사처벌이 남루해 보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랑은 그 방법부터가 철저하게 사랑에 입각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감시와 처벌은 불신과 공포라면 몰라도 결코 사랑의 방법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자꾸 묻게 된다. “주여! 저들은 지금 저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하고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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