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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정신분석학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억압된 것의 회귀!” 자세히 풀어보자.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용수철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용수철을 누르면 그것은 반드시 다시 튕겨 나오기 마련이다. 어느 때 튕겨 나오는지가 관건이 된다. 바로 튕겨 나오면 상관이 없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안정을 취할 테니까. 문제는 눌러졌을 때 바로 튕겨 나오지 않는 경우다. 그것은 무엇인가가 튕겨 나오는 힘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이익과 불이익을 계산하는 알량한 자아가 그 역할을 한다. 엄청난 압력을 가진 채 일촉즉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권력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노를 꾹 눌러 놓는다. 참지 않고 상급자에게 분노를 표출한다면, 우리가 당할 불이익이 만만치 않으니까.
표출되지 않고 억압된 분노는 엄청난 압력을 가지고 있다. 마치 물을 가득 채우면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물 풍선과 같다. 아마 물 풍선의 부위 중 가장 약한 부위가 물이 터져 나올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직장 상사에게 표현하지 못한 분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애완견이나 자신의 아이에게 터질 수가 있다. 애꿎은 아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의 분노는 나름대로 해소된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 대신 아이가 자신의 분노를 억압할 테지만 말이다. 아마 아이는 자기보다 약한 학급 친구에게 그 분노를 표출할 것이고, 그 친구는 다시 또 다른 약한 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 정도면 분노의 윤회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만약 충분히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사랑하는 아이를 기꺼이 파괴시키는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탈출구를 찾지 못한 억압된 분노는 우리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여성의 경우 안면 근육 마비 등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쩌면 히스테리 증상과도 같은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억압된 감정을 자신의 육체에나마 표출했으니까 말이다. 대부분 우리 이웃들이 선택한 전략은 더 비극적이다. 다름 아니라 분노와 같은 어떤 감정이 발생할 때, 그들은 감정 자체를 완전히 억압하여 교살하는 전략을 선택하니까 말이다. 권력자가 커피 잔에 가래를 뱉고 마시라고 할 때, 일체의 감정을 죽인 사람이라면 분노라는 감정이 발생할 리 없다. 당연히 권력자와의 마찰도 그리고 뒤따르는 불이익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적인 사회, 혹은 전체주의 사회를 가름하는 척도를 하나 얻게 된다. 개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기 힘든 만큼, 그 사회는 권위적이라는 것이다.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그 성원들이 좀비와 같다는, 혹은 기계와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너무나 권위적인 시부모를 두고 있는 며느리의 창백한 얼굴, 갓 군대에 입대한 이등병의 경직된 몸, 군경의 총칼 앞에서 굴비처럼 끌려가는 시위대의 잿빛 행렬 등등. 그렇다.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자신에게 침을 뱉었다고 해서 시체가 분노하거나 기계가 화를 내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감정이 발생하고 그것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권력자가 웃기는 짓을 하면 웃고, 그가 부당한 짓을 하면 분노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쩌면 구성원들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당당해질 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힘이 있을 때에만, 민주주의는 간신히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러스트 ㅣ 김상민
▲ 감정 자유롭게 표현 못한다면
개인 억압하는 권위적 사회다
인문학과 예술의 존재를 통해
삶을 옥죄는 게 뭔가 돌아보라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억압 체제는 항상 성원들에게 감정을 죽이라고 노골적으로 강제하거나, 아니면 은근하게 훈육한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교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해서도 안된다. 이럴 때 우리는 마침내 당당한 삶의 주인이 되며, 동시에 자유라는 오래된 이상이 현실에 그 당당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만의 감정과 꿈을 자유롭게 노래했던 인문정신과 예술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만든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억압되었던 우리만의 감정과 꿈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일까. 자신의 삶이 무기력해지거나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문학을, 음악을, 그리고 영화를 보러 가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 감정이 메마르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문학과 예술이란 오아시스를 찾는다. 카프카를 읽으면서 우리는 체제의 압박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베냐민을 읽으면서 우리는 억압체제에 대한 분노의 불을 다시 지필 수도 있다. 혹은 베토벤의 소나타를 들으며 우리는 삶의 깊은 비애를 회복할 수도 있다. 아니면 혼자 영화관에 들러서 기쁨, 절망, 슬픔, 혹은 환희의 감정을 수혈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면, 더 자세히 말해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이 아니라면, 삶은 죽음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돌아보자. 즐거움, 분노, 슬픔, 환희 등등 너무나 소중한 감정을 오늘 얼마나 표출했는지.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출할 수 있었던 만큼, 우리는 살아있었던 것이고 자유로웠던 것이다.
어쩌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오늘 하루도 지나간 것은 아닌지. 만약 불행히도 그렇다면, 다시 숙고해보자. 도대체 무엇이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을 가로막고 있는지. 오직 이런 철저한 숙고와 반성을 거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유를 옥죄는 권위주의적 구조에 직면할 수 있다. 마침내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지점, 어쩌면 번지 점프대에 서게 된 것이다. 뒤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뛰어내릴 것인가? 바로 이 아찔한 순간이 찬란한 순간이기도 하다. 한번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공포가 사실 과장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반면 다시 뒤로 물러서면 우리는 용기와 비겁, 그러니까 자유와 굴종의 번지 점프대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 ‘절정’에 서 있다. 그리고 절정에서 뒤로 조금 물러나는 순간 시인처럼 누구나 가슴을 치며 읊조리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자신이 비겁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비겁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더 많이 물러나 아예 번지 점프대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비겁했던 자신의 모습마저도 깨끗이 잊을지도 모른다. 비겁함을 비겁함으로 아프게 자각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비겁해질 것이다. 이제 번지 점프대에서 뛰어내리자. 이것이 바로 사자와 같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정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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