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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이 무너졌다. 아니 이미 무너져 있었다.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갑질’이라는 표현.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지 않고 절대화된 권력만을 응시한다. 자본의 폭력도 ‘갑질’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흙수저’ ‘금수저’라는 표현. 근대 자본주의가 뒤르켐이 말하는 교육의 평등을 통한 기회의 평등을 주되 경쟁에서의 불평등을 시장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면, 지금은 그 자본이 대대손손 승계되어 자본의 사적 소유가 고도로 개인화되고 집중된다.

미국인 가족 0.1%가 하위 90%와 맞먹는 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최근 통계는 시사적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공평’하자는 주장 혹은 강렬한 염원이다. 어떤 시사만평으로 이를 얘기해보자. 네모난 마당 양쪽에 두 인물이 있는데, 한 사람 쪽으로 현격하게 기울었다. 즉 균형추가 무너져 심하게 불균형한 권력관계의 모습이다.

기운 쪽의 사람은 가장자리로 떠밀려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고 뭔가를 안간힘 쓰며 시도한다. 하지만 이미 균형추가 현저하게 무너졌으므로 그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는 더욱 쓸려 내려간다. 이건 양자관계 말고 삼자, 아니 복수의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 기운 운동장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위쪽 사람의 무게 때문에 바닥으로 결국 추락한다. 하지만 그 위의 사람은 모른다. 자신의 아래를 받치고 있는 그가 떨어지면 그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것. 이것이 바로 바닥을 향한 경쟁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얘기라지만 이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 아니 계급사회로 일반화할 수 있다.

박근혜 퇴진을 외친 촛불들은 단지 박근혜 한 사람의 교체로 만족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주말집회에서 이런 발언들을 수없이 들었다. 결국 이 말은 사람들이 단지 ‘정권교체’만을 위해서 촛불을 든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근데 느닷없이 정권교체가 시대의 정신인 양 이야기된다.

나는 촛불시민이든 민중이든 노동이든 국민이든 뭐라고 불리던 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박근혜 퇴진을 외치면서 표현한 것은 바로 이 현저하게 무너진, 그리고 불균형한 권력관계에 대한 분노였다고 생각한다. 권력 ‘농단’은 바로 불균형한 권력을 절대화하고 사유화한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박근혜·최순실 일당만이 아니라 정몽구·이재용 등의 재벌총수들이나 이 사회에서 갑질하는 인사들, 금수저들의 ‘농단’도 포함된다. 혹은 공안기관의 몽니와 편파성도 포함된다.

촛불 이후 ‘우리’의 공통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저하게 기울어진 권력관계의 추를 조금이라도 재편하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불균형을 용인하는 제도를 바꾸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몫을 찾아 나설 수 있는 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일하면서 죽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조를 만들고, 부당한 노동행위에 맞서 싸우는 파업권을 갖는 것이다. 노동악법을 철폐하고 노동법을 전면 개정하는 일이다. 둘째, 사회적으로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집회·결사 자유를 농단하는 공권력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상과 이념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것이다. 셋째, 정치적으로 대의제민주주의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정당비례대표제가 꼭 필요하다.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정당을 지지하거나 세울 것이고 그들의 대표성은 제도정치로 반영돼야 한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남북 평화협정 체결이다. 이는 국가주권의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것이며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다.

촛불에 제안한다. 누구를 지지하는 것은 한순간이고, 빈약한 민주주의를 채우고 다르게 재편하는 것은 긴 정치적 과정의 결과물로 남을 것이다. 정치인을 믿지 마라, 스스로를 믿자. 나는 위의 4가지 조건이 이 사회 안에 현저히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바꾸고 스스로 싸워나갈 첫 번째 조건, 아니 최소의 정의를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쟁취하자!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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