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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재벌대기업의 2세, 3세들이 제빵제과점, 커피숍, 순대사업을 비롯해 분식,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돈 되는 데마다 무차별 진출하여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농협유통 등과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재래시장을 밀어내면서 보통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해체하는 일 또한 더 널리, 더 공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에게 자유롭고 인간적인 경제생활의 공간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일본 도쿄를 방문할 때면 나는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갖곤 한다. 골목 상권이 살아있고 이웃과 더불어 경제생활을 하는 공간이 있어서다. 

그런 경제공간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도시의 주거환경 자체가 우리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큰 규모의 현대적 건물과 작은 옛 건물들이 공존하고, 드문드문 산재해 있는 아파트단지와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전통적인 단독주택들이 잘 조화를 이루면서, 뒷골목에는 자영업자들과 영세 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기업소매점포에 관한 소매영업활동 조정법’이라는 긴 이름을 갖는 소매상보호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제정된 이래 법의 명칭이 달라지고, 여러 번 개정된 이 법 때문에 대형 마트들의 진출을 제한하고 주거지역의 재래식 영세소매상을 보호할 수 있었다. 

법의 제정과 개정을 주관했던 통산성(현재 경제산업성)은 상인, 소비자, 지자체의 공익대표를 참여시켜 장기간 논의하고 타협할 수 있는 협의기구를 두었다. 대형 마트나 대형 소매업체뿐 아니라 영세 상인들의 참여와 대표 역시 균형적으로 이루어진다. 대형매장이 들어설 때에는 한편으로 통산성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고, 다른 한편 소매영업자들에게는 비토권이 주어진다. 법적 제도화를 통해 대기업과 영세 소상인들 사이에 일방적인 힘의 불균형을 방지한 것이야말로 일본 대도시의 생활환경과 경제활동을 인간미 있게 만든 토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균형적으로 고려하는 제도화의 전형적 원리는, 대기업과 중산층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공존할 수 있게 한 전후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원리가 일본의 자민당과 독일의 기민당이라고 하는 보수 정당의 주도로 실천되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어떨까?
 

출처 : 경향DB



필자가 방문한 마포구 공덕시장의 사례는, 대형마트의 등장과 전통시장의 쇠퇴 내지는 소멸이라는 일반적 현상의 단면을 잘 드러낸다. 바로 2주 전 공덕시장에서 불과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국내 최대 유통업체인 이마트공덕지점이 개장하면서, 그러한 우려는 본격적인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곳 재래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진아 마포구의원의 안내로 ‘공덕시장상인회’와 ‘홍대걷고싶은거리 상인연합회’ 사람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을 공덕시장의 명소인 ‘청학동부침개’집에서 만났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필자는, 재래시장과 대형마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제정된 유통산업발전법의 실제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1997년 제정된 이래 여러 차례 개정이 있었지만 법의 논의, 심의, 개정 과정에서 중소영세상인들의 참여는 없었다. 

대형마트 진입이 규제되기 시작한 재작년 법개정 때, 대기업들의 로비로 인해 대형마트들이 들어올 수 있는 재래시장과의 거리제한이 500m로 규정되었다. 너무 가깝다는 비판 여론이 커지자, 작년 중반 거리제한이 겨우 1㎞로 늘었다고 한다. 2㎞도 부족하다고 보는 상인들 입장에서는, 졸속적이고 임시방편적인 개정이 아닐 수 없다. 공덕시장 근처의 이마트는 국회에서 이러한 거리제한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에 건축허가를 받았다. 건축 후 점포개설 등록은 유통산업발전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였다. 법의 시행이 지자체의 조례규칙을 따르도록 되어 있고 그 규칙이 제정되기 전에 등록을 받았다고 하니 위법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입법 정신에 배치되는 점포개설 등록이 옳은 행정적 처분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상인회 사람들은 건축허가에서 점포개설 등록까지 “모든 일이 007작전하듯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은 재벌 유통업체와 마포구청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조를 지칭하며 “그들을 어떻게 당해”라는 말을 덧붙인다. 내가 상인회 간부들에게 왜 건설과정에서 문제삼지 못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가림막을 치고 공사를 해서 그냥 큰 건물이 들어서는 줄 알았지, 이마트인지는 몰랐다”고 말한다. 유통산업발전법이 만들어지고 시행자가 지방자치체로 지정됨에 따라 마포구의회는 지난해 이른바 ‘상생’조례를 제정했다. 조례에 따르면 구청장의 주관하에 대기업과 재래시장의 중소유통기업 대표들, 주민대표들이 참여하여 상생발전협의회를 운영하게 돼 있다. 그러나 상인회 간부들은 이러한 상생조례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결같이 불만을 토로한다. 

구청은 상인 보호는 고사하고, 상인회 대표들을 만나려 하지도 않는단다. 항의도 소용없었고, 구청장이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뀐 뒤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반대로 이마트의 개장이 재래시장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영세상점이나 대리점들의 매출은 절반으로 떨어지고, 시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면서 식당들에는 손님이 격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설 대목에서도 청과물과 음식점 매출이 뚜렷이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상인들은 “이마트 직원 200명을 먹여 살리는 대신 4000명의 우리 상인 가족들의 생계가 위협받게 됐다”고 말한다. 주변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가격인하를 통해 고객을 불러 모으고 그래서 재래시장과 그 주변의 상점, 대리점들이 가격 경쟁을 포기하고 나아가 공덕시장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면 가격인상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자 이익도 시장경쟁의 효율성도 발휘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들의 말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맹점, 나아가 한국 경제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신자유주의 때문이자 경제에서 힘의 중심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옮겨갔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다시 국가 쪽으로 힘의 중심을 옮겨야 하고 정부 역할을 키워서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거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체제로의 전환에 있으며, 이는 국가와 대기업의 유착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장경쟁의 이점 내지 시장효율성을 추구한다는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간 실제로 있었던 일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거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경쟁적 시장질서가 대기업 중심의 독점구조로 변화되었다는 데 있다. 

여론매체와 정부의 역할 역시 대기업의 이익에 부응하도록 변형되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국가 대 시장’이라고 하는 이분법은 지금과 같은 경제체제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방해한다. 대기업은 시장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 모두로부터 독립해 있고 또 그들을 규제하는 제도적 실체가 되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대기업의 과도한 영향력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 이들에 의해 변형된 국가 관료제와 여론매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대기업의 독점적 영향력으로 인해 파괴된 시장경쟁과 효율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소기업과 소매업체들의 경제적 활력을 복원시키는 일은 단순한 온정적 조치가 아니라 한국경제와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문제라는 것이다. 총선,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들 모두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중소기업과 소자영업자, 노동자와 같은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대표의 문제는 말하지 않는다. 

이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자율적 결사체를 강화할 수 있는 기반 없이, 대기업·정부관료·주류언론의 유착을 제어할 수 있을까? 사회적 힘의 관계를 더 넓게 다원화하는 작업 없이, 정당들이나 정치인들이 무정형의 여론매체 위를 둥둥 떠다니며 공허한 개혁 언술을 남발하는 것으로 과연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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