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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오늘의 농업·농민 문제를 생각하면 ‘극측반’(極則反)이라는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극에 다다라 반전될 수밖에 없다는 뜻처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느낌 때문이다. 농업은 경제의 성공신화를 주도했던 제조업과 지식정보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정확히 반비례하면서 퇴행해왔다.
급속한 고령화와 인구감소, 농가부채 증가, 생산비중 축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식량자급률 등의 통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농촌이 이토록 피폐화된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 수 있을까? 농업의 붕괴 위에서 산업 발전이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농촌의 피폐와 농업의 붕괴는 방치되어 왔을까? 

농민들의 요구와 불만은 왜 정책으로 수용되지 못했을까? 농민이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어 조직화되기 어렵다는 점도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정당체제가 노동자나 농민, 중소기업, 자영업자와 같은 생산자 집단들의 이익을 두고 경쟁하기보다 폐쇄적인 지역갈등 구도에 얽매어 있었다는 데 기인하는 바 크다. 지난 10년 동안만 해도 농업인구가 22%나 급감해 이제는 겨우 300만명밖에 안되는 열세 집단이 되었다는 점도 정당들이 그들에게 다가갈 유인을 줄이고 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단절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농업·농민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대 문제로 다시 논의될 수 있게 될까? 

배추값 폭락 항의하는 농민들 (경향신문DB)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최근 나는 두 그룹의 농민운동 활동가들을 만났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이창학씨는 386세대로 그 세대 여러 청년들이 그러했듯 브나로드운동에 투신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처럼 직접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며 농민운동에 투신했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혁적 전선 운동”을 지향했던 전농은 1990년대 중반 우루과이라운드와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할 때 농산물수입개방 반대투쟁의 전위부대로 정부 당국과 맞섰다.
흥미로운 것은, 지지하고 기대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뒤통수 맞는” 경험을 해야 했고, 자유무역협정(FTA) 반대투쟁에서 또다시 전위부대로 나서야 했다. 정부정책의 방향을 바꾼 것도 아니고 조직이 성장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전농의 싸움은 자기 소진적이었을지 모른다. 이창학씨 역시 “비판하고 반대하는 투쟁은 했지만 이슈를 선점하고 현실적 대안을 만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투쟁이 완전히 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농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예산을 지원하는 한편, 기술영농과 품종개량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축산, 과수, 낙농 등 분업화된 업종을 중심으로 품목단체들이 성장하게 된 것도 전농의 투쟁이 가져온 간접적 효과일지 모른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의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경향신문DB)

 

하지만 전농이 길고긴 고난의 역정을 거쳐 도달한 오늘의 상황은 기대한 바와는 너무나 다르다. 농민들의 경험담을 엮은 <농촌에서 온 편지>(한국농정, 2011)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동안의 모든 농촌정책은 실패했다. 그 실패는 고스란히 농민이 떠안아야 했다……그 고통의 세월을 떠안고 사는 사람들이 지금의 농민이다.” 다른 편지에서 한 농민은 “어쩌다 농업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회의다 모임이다, 많이도 다녀봤다. 엉뚱하게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고, 같은 농민에게 빨갱이 소리도 들어봤다……집사람은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농민운동 활동가들이 갖는 좌절감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두 번째로 만난 그룹은 지역농업네트워크운동, 협동조합운동, 농정연구와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지식인 내지 연구자 중심의 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적인 목표는 영농은 물론 육아, 교육, 의료 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연계된 자립적인 지역이자 삶의 공간으로써 대안적인 농촌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모두 농민단체, 농협, 주민과 지자체 등 농촌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두루 참여하여 농민들의 요구와 이익을 대표하고 공적 문제를 결정하고 운영하는 협치(協治)의 체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중심기구로 농업회의소를 들었다. 그것은 시·군 단위의 지부로부터 상향식으로 조직되는 농민단체의 센터 역할도 하고, 지자체와 함께 대의기구로서 역할도 하면서, 농민을 위한 실질적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말한다. 유럽 노사관계에서 말하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당사자와 공익대표가 함께 참여하는 협의 및 결정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협동조합 건설에 집중해 온 김기태 소장은, “농업계는 계속 닥쳐오는 통상정책의 변화에 대응할 여력이 없고, 전농이 싸움은 잘하지만 새로운 농업 문제에 대응할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안으로 그는 안전한 먹거리 공급과 식량안보의 관점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농촌과 도시, 농업계와 비농업계를 묶는 네트워크 형성을 주장했다.
지역농업네트워크운동을 주도하는 박영범 대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 농업정책에 대한 올바른 이슈 제기, 대안적인 정책의 발굴을 통해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항의와 투쟁 중심의 운동방식이나 품목단체의 이익집단 활동 모두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농정연구센터의 황수철 박사는 “농촌은 한번 망가지면 복원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업과 농촌이 지속가능한 토대, 말하자면 사회공동자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역시 우리의 농촌과 농업이 완전히 망가지기 직전상태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인상적인 것은 어떻게든 사태를 개선해 갈 수 있는 공동 결정의 영역을 찾고자 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농업이 우루과이라운드와 WTO 체제를 통해 개방 압력에 완전히 노출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농가소득도 60세 이하만 계상하면 도시평균가구소득보다 낮지 않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소득농업을 확대해 세계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기반과 주체형성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듯이, 농업은 단순한 1차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가장 가깝게 결합되는 생산 활동의 영역이기도 하고, 식생활과 건강이라고 하는 인간 공동체의 재생산 기능을 담보하는 영역이다. 튼튼한 농업 없이 누구도 경제생활의 쾌적함을 향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농업문제는 생산자와 소비자, 농촌과 도시, 농업과 비농업 분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국가적이고 국민적인 문제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누가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와 농민운동 간의 엄청난 힘의 불균형을 생각할 때 과거 전농이 추구했던 변혁 노선이 성공하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농업연맹(AFBF)처럼 자신들을 대표하는 의원들을 움직여 정책을 만들 능력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대안적 농촌공동체를 지향하는 많은 아이디어들이 상당한 공감을 얻더라도, 누군가 그 길을 정치적으로 개척해주기 전에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우루과이라운드로 쌀 수입개방 압력이 커지고 있던 시기, 일본 시코쿠 지방에 있는 고치현 농촌마을의 한 노쿄(農協) 지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그들은 매우 실천적인 이익집단으로서 쌀 개방에 대응하는 전략을 토의하고 있었다. 영농기술 제공부터 시장정보 및 금융지원과 같은 구체적인 사업도 진행했다. 집권 자민당은 노쿄와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었고 농민 이익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일본 보수주의가 갖는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농민을 가볍게 여기고 농촌을 해체하는 정책을 펴는 한국의 보수정당들과는 크게 대비를 이룬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약자와 소외세력을 보호하고 사회적 공존의 틀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정책의 결정과정은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들의 참여가 배제되어 있다. 누가 이들의 요구를 조직하고, 이들의 이익을 대표하게 될까? 올해의 양대 선거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정당 대안을 만나게 될까? 그리하여 농민·농촌 문제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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