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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경향시민대학장·고려대 명예교수


지금의 민주당에는 두 개의 진보 노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가 ‘민주 대 반민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진영 간 대립의 노선’이라면 다른 하나는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지를 준비하는 ‘대안 정부 노선’이라 할 수 있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진영 간 대립노선은 반권위주의, 반부패, 반권력과 같이 도덕적 가치나 이념적 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상주의적 열정과 정조를 불러일으키고 ‘운동의 정치’를 되살리고자 하는 경향도 강한데, 그러다보니 이 노선은 자주 반정치의 태도와 정조를 동반한다. 또한 반엠비, 반박근혜, 반새누리당의 슬로건이 말하듯 적대적 대립의 축 내지 두 블록 간의 전선을 상정한다. 격렬한 언사를 동원해 상대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을 지향하기도 한다. ‘독재 회귀’, ‘신공안정국’ 등을 외치면서 보수정부가 권위주의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원할 때도 많다. 이러한 노선은 상대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얼마나 강하냐가 진정한 진보를 가늠하는 척도인 것처럼 인식되는 현상을 만든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민주당은, 그런 종류의 공격에 시간과 당의 에너지를 쓸 만큼 여유를 즐길 수 없다. 그런 노선을 지속하는 한, 당 체질의 정비를 통해 대안 정부로서 실력을 쌓는 일을 등한히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하고 당력을 기울이는 데 있다. 이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유능함을 인정받고 신뢰를 얻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공익에도 기여할 뿐만 아니라 선거 전략으로서도 더 효과적이다.

안타깝게도 4월 총선 이후 민주당은 지난 총선 전략이 왜 잘못되었나를 평가하고, 다가오는 대선에서는 어떤 전략으로 임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총선 패배를 하루라도 빨리 잊고 싶어서였는지, 공격적 노선을 더 강화했고 그 경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추상화되고 도덕화된 반대담론이 강해질수록, 정치의 방법으로 일을 성사시키는 ‘진지한 정치’는 필요치 않게 된다. 뜨거운 열정의 동원에 몰두하는 정치는 실제의 사회 현실과 괴리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당연히 내용적으로 더 얄팍해지는 일은 불가피하다. 지난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축을 불러들여 야권연합을 성사시켰지만 기대했던 승리는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소외세력의 소리는 대표되지 못했고 노동 문제 역시 주요 이슈에서 배제됐다는 점일 것이다. 한·미 FTA 폐기, 재벌개혁, 보편적 복지 등 개혁적인 것을 넘어 급진적이기까지 했던 주장과 수사들이 소리 높여 외쳐졌던 것을 생각하면 커다란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진보적 슬로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통해 실천 가능한 아젠다로 설정되지도 못했다. 유권자들은 정치 슬로건을 단순히 선악으로만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러한 개혁 사안들을 야당이 실천할 능력과 진지함이 있는지를 점점 더 중시하기 시작했다. 지난 총선은 민주당이 집권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수 시민들이 강한 의구심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도 시민들이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민주당은 정부가 될 수 있는가?’에 있다. 민주당이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최장집 교수 강연, 2012 민주당의 과제 ㅣ 출처:경향DB

열린우리당 이후로 민주당은 작동 가능한 당내 권력구조를 제도화하고 리더십을 창출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했다. 그 결과 현재 민주당은 일정한 정치적 자원을 가진 여러 명의 개인과 세력이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파당들의 느슨한 집합체에 불과한 구조를 갖게 됐다. 선거 때 그것은 ‘캠프’가 된다. 이 캠프에 정당 안팎의 정치인, 정치지망자, 지식인, 전문가그룹들이 참여해 대선을 치르는 것이 오늘의 한국정치가 됐다. 정당의 공적 조직이 아니라, 캠프가 대통령을 만들고 청와대를 지배하고 정부를 주도한다. 이는 선거 이후 정부들이 한결같이 실망스러운 실적을 보이게 되는 것과 분명하고도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 캠프 혹은 캠프 내 특정 팀이 구성한 청와대, 정부가 제대로 된 것일까? 나아가 그런 정부가 진보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정당정치의 허약함은 지금도 계속해서 나쁜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그 가운데 하나는 대선 후보 선출이 계속해서 늦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빨라야 10월 늦으면 11월에 후보가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통령선거 캠페인은 길어야 두 달밖에 가능하지 않다. 누가 어떤 정부를 만들게 될지는 이 짧은 기간 동안에 판단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여론조사, 개방형국민경선, 모바일투표로 이어지는 후보 선출 방식의 변화 역시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정당의 역할을 필요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원이 아니라 정당의 역사와 이념, 노선과 무관한 일반 투표자들이 당의 공식 후보를 결정한다는 발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가히 혁명적이다. 이처럼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결핍현상은 점점 더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시민-투표자들은 좋은 대통령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의 기회를 충분히 향유하지 못한다. 엄청난 권력, 권한을 갖는 대통령을 우리는 너무나 즉흥적으로 선출한다. 그렇게 선출한 이후에는 합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당의 기반 또한 약하다. 정당이 정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무관한 대통령, 정당과 무관한 정부가 되는 길이 급진적으로 넓어지고 있는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기존의 진영 간 대립구도에 기초한 전투적 대결노선이 아니라 좋은 정당정부를 준비하는 노선이 강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이 가능할 수 있다.

첫째, 의제 설정에서 변화가 필요하다. 한국 정당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당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야당이 특히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어떤 정부가 될 것인지를 준비한다는 것은 경제운용에 대안을 갖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야당도 유능하고 실력 있는 정부를 만들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여야 간 정치경쟁의 중심축을 이동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치와 열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타협이 어려워 대결의 정치를 불러오는 민족문제 내지 이념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부터, 협상과 타협이 가능한 부의 분배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문제로 갈등 축을 이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집권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투입과 산출 측면에서 각각 당의 능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누구를 대표하나? 민주당이 허약한 가장 큰 이유는 사회경제적 기반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당 내부로 그에 상응하는 사회경제적 힘이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당사자 집단의 참여를 동반하는 투입측면이 강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채널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동시에 당의 산출측면의 능력이 또한 제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당의 선출직 대표와 비선출직 전문가그룹이 함께 정책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실력을 조직화하고 집단화하는 노력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셋째, 당 리더십과 대선후보 선출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민주당은 그동안 권력, 권위의 분산을 통해 당의 중심성과 리더십의 해체를 목표로 한 제도 개혁을 추진해왔다. 일종의 자해적 정당개혁이라 하겠는데, 이는 민주주의와 정당의 역할을 잘못 이해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정당 조직이 약해지면, 정치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의 참여와 대표성이 약해진다. 응당 행정 권력과 경제 권력을 견제할 힘도 약해진다. 현재와 같은 당의 구조를 리더십이 중심이 되어 일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모바일투표를 포함해 완전개방형 경선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맹목적 주장들에 대해서도 견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지금도 약해서 문제인 정당의 정체성과 리더십을 더욱 해체시킨다. 모바일 기제에 친숙한 그룹이 과다대표되는 문제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당이 대표하고 뿌리를 내려야 할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중산층과 서민 내지 소외계층과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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