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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대통령 임기 말이 되면 정치권 어디에선가 헌법 개정 논의가 제기되고는 한다. 거기에는 두 방향에서의 동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헌법을 바꾸면 정치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는 가정, 말하자면 헌법을 바로세우는 것이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이해하는 법적·제도적 접근이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헌 논의라는 것이 대개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흔들어 뭔가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자원이나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단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초점은 언제나 대통령 임기를 늘리는 문제 아니면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하는 권력 관계에 맞춰져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법적 근간으로서 헌법을 이해하는 방법이 극히 협애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개헌 논의가 자주 제기된다는 것은, 민주정치의 실천이 그만큼 불안정한 기초 위에 서있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나 있는 헌법, 있는 제도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헌법을 바꾸자는 주장을 자주 하는 것은 더더욱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굳이 제도나 규칙을 바꿔 사태를 좋게 만들고자 한다면, 대통령제 임기를 단임제에서 중임제로 바꿀 것이냐 아니냐 혹은 대통령 중심제를 의회 중심제로 바꿀 것이냐 아니냐를 말하기 이전에,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국민의 대표를 뽑는 제도를 개선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접근이다. 이 점에서 최근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쟁자들이 후보선출 방식으로 결선투표제에 합의한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물론 민주당의 결선투표제는 아직 한 정당의 선거제도 이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민주당의 결선투표제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제도를 개선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도 그 자체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학 이론에서나 다른 나라의 경험적 사례에 비추어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표적인 선거제도만 놓고 보더라도 단순다수제와 비례대표제는 각각 장단점을 나눠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마다 그들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제도를 선택하고 있으며 개선해야 할 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양한 혼합형을 발전시켰다. 단순다수제의 변형이라 할 프랑스식 결선투표제와 비례대표제의 변형이라 할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 공청회 l 출처:경향DB

1위 득표자를 곧바로 대표로 결정하는 단순다수제 대신 결선투표제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데는 그럴 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대통령 중심제와 제도적 상보성이 좋기 때문인데, 개헌과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보다는 선거제도를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정치를 좋게 만들 수 있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결선투표제의 모델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우리와 같이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채택하고 있으면서 대선과 하원의원을 결선투표제를 통해 선출하는 프랑스라 하겠다. 우리 현실에서 특정의 선거제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 정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우선적으로 필요한가 하는 판단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최대 문제는 여야 간 극단적인 적대감 내지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현상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합리적인 경쟁과 토론을 어렵게 하고, 특정 정당이나 세력에 대한 지지 강도가 강한 소수의 사람들이 정치를 지배하게 만든다. 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정치 밖에서 제3의 대안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정치 안에서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사회적으로는 기존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구원자를 갈망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정치적 양극화를 완화하는 제도적 대안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단순다수제 방식으로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대표를 뽑는 현행의 소선거구제는 정치의 세계를 양분하는, 양극화된 경쟁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제도가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양당제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기보다는 이른바 ‘진영 간 대립’을 강화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기존 정당 내지 정당체제가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져오는 정치적 압력은 부정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당의 정체성을 상대에 대한 적대감에서 찾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가치·열정·전통이 서로 다른 소수 정당과 정치세력들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다원주의 발전을 억압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 결과는 양당제의 제도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당제의 발전도 아닌 것으로서, (이탈리아 출신 정치학자 지오반니 사르토리가 말하는) “양극화된 다원주의”(polarized pluralism)의 심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결선투표제에서 유권자들은 적어도 1차 투표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의 당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유권자들의 다양한 선호가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짐에 따라 작은 정당들도 대표될 수 있는 온건한 다당제 내지 정치적 다원주의가 허용될 수 있는 여지는 커진다. 이 점에서 귀도 타벨리니(Guido Tabellini)와 다른 두 명의 이탈리아 경제학자들이 이탈리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의미가 있다. 그들은 인구 1만5000명 이하에서 시행되는 단순다수제와 그 이상 선거구에서 시행되는 결선투표제를 비교 분석해, 단순다수제에 비해 결선투표제가 정치적 극단주의를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의 발견은 한국에서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결선투표제는 약한 정당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도와준다. 동시에 2차 투표에서 자신들의 정책 대안을 큰 정당들과 협상을 통해 정치연합 내지 정책연합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정책 내용은, 이념적 슬로건이 아니라 현실에 보다 가까운 정책 대안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결선투표제는 오늘의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부정적 특징이라 할, 최고통치자 선발 과정에서의 공적 심의의 부실 현상,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결핍 현상을 개선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가기구를 관장하고 그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엄청나게 크고 광범한 것에 비한다면, 통치자를 선출하는 과정과 방법은 너무나 허술하다. 후보를 정당이 선출한다하더라도 사실상 그것은 정당 내 (일종의 사적조직으로) 캠프가 주도한다. 당연히 누군가가 그 경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사실상 그 정당의 정부가 아닌 특정 캠프의 정부가 된다. 정당이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역할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정당 내부의 후보 검증과 평가 과정도 발전이 전혀 없다. 당 내에서 후보가 선출되는 과정뿐 아니라 그 이후 선거법이 허용하는 공식적인 선거운동 기간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과 평가 및 결정 과정이 이토록 짧은 극렬 드라마를 통해 이루어진다 할 때 그 위험성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여기에 인터넷 투표, 모바일 투표, 여론조사와 같은 방식이 결합될 때 그 위험성은 배가된다.

정치가 순간의 열정과 급변하는 여론에 휘둘리는 현상은 이미 충분히 심화되었다. 이성적 논의를 위한 공적 공간을 이제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런 조건이라면 최고통치자를 잘못 뽑고 사후에 촛불을 들어야 하는 악순환은 계속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결선투표제는 1차 선거결과를 통해 시민의 다양한 선호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를 기초로 모두가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고 보다 더 신중한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한 번의 결정이 갖는 위험을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면 무한히 경박해진 “인스턴트 정치”를 보다 사려 깊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선거제도를 도입하고 확대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최소한 헌법을 바꾸는 무책임한 거대 도박판을 벌이는 일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이고 또 민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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