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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극단적인 불확실성에 있다는 점이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후보가 결정되는 과정은 무정형적이고 불가예측적이다. 선거를 100일도 안 남겨 놓은 지금, 여전히 후보가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병리적 측면을 반영한다. 앞으로 무슨 사태가 전개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한국정치이기 때문이다. 모든 후보들이 복지국가, 양극화 해소, 반값등록금,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는 현실이다. 보수적인 후보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후보나 할 것 없이 같은 공약을 내세우는 선거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당 해체의 현상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당을 지배하는 것은 캠프다. 당이 후보를 지명하고 당의 후보가 정당 간 경쟁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캠프라는 이름으로 특정 후보자와 인적 집단이 당을 지배한다. 그러다보니 정당이 정부가 되고 책임 정치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캠프가 청와대가 되고 정부가 되어 집권당조차 소외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임기 후반에 대통령의 인기가 없어지면 반대로 집권당이 나서서 정부와 거리를 둔다. 과거 노무현 정부 시기에 만들어진 이러한 패턴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집권당 후보가 아니라 야당 후보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마치 박근혜 캠프의 제1원칙은 ‘이명박 정부와 무관해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해 시민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당선만 될 수 있다면 무슨 행동, 무슨 공약이든 다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의 선거는 책임으로부터 방면된 권력자를 뽑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그때 선출된 권력자는 막스 베버의 말대로, 특정 후보자 개인이 정당이라는 매개 없이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데마고그(demagogue) 이상일 수가 없고, 사실상 군주를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데마고그가 정부가 된다면, 사적으로 가까운 측근과 전문가집단, 나아가 관료에게 의존하는 통치는 필연적이다. 


(경향신문DB)


한국 정치의 이런 악순환 구조를 생각할 때,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문재인 후보가 “책임총리”, “정당책임정치”를 제시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비록 그것이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위한 전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정부 운영 방향을 옳게 정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중심제의 특성이자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승자독식 원리는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권력 독점을 허용하는 문제가 있다. 강한 열정을 가진 추종자 집단을 가진 후보의 경우, 비록 그가 협소한 사회적 기반을 대표한다 하더라도 권력 장악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또 증오를 정치 동원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집권당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되고 결국 내부로부터 해체와 무기력증을 앓게 될 수도 있다. 정당정치의 붕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안철수 현상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공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정치가 악순환을 끊고 새롭게 도약해야 한다면, 극단적인 불확실성을 줄이고 정치적 인과성과 예측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집권당과 정부 사이의 협력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것을 통해, 책임 정치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다행히 현행 헌법은 청와대 중심의 정부 운영이 아닌, 책임총리와 집권당이 의회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대통령 1인 중심의 통치가 갖는 과부하를 줄이고, 집권당을 정부 운영의 책임 있는 주체로 불러들이는 것이 헌법 정신에도 부합하고 또 정부 정책의 책임성을 튼튼히 할 수 있는 길이다. 이는 정당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집권당은 활력을 갖게 될 것이고, 야당 역시 예비 내각을 구성해 그에 상응하는 정책 능력을 발전시켜야만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기회를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정당의 정부가 되는 길을 개척하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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