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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대통령의 책임성 부재는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정치는 대표의 선출과 함께 선출된 대표가 그를 선출해준 투표자들에게 책임지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 즉 평상시에도 선출된 통치자가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선거 때만 민주주의가 있고 평상시에 없다면, 그것은 왕을 선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상시에도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좋은 정부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4년 중임제로 개헌하자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거제도를 바꾸자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정부형태를 아예 의회가 중심이 되는 내각제로 바꾸자고 한다. 제도는 언제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뒷날 우리가 어떤 제도를 선택하든 현재 시점에서 먼저 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하겠는데, 그것은 권력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익히고 실천하는 일이며, 이를 주도할 민주적 리더십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개헌은 그 자체로서도 넓은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제도를 바꾸어 정치를 좋게 만들려는 접근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의 규범과 원리를 실천하면서 “통치의 기예(art of government)”를 훈련하고 축적하는 것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간 숱하게 이루어진 제도개혁과 함께 정치발전을 위한 수많은 모델들이 난무하고 수많은 정치공학적 아이디어들이 짧은 사이클로 명멸한 뒤 만나게 된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현실이다. 현재의 제도적 틀 안에서 그리고 주어진 조건에서 정치발전을 도모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는 것 없이, 뭔가 우리의 정치현실 밖에서 새로운 대안을 들여오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한국정치는 “정당정치의 해체”로 특징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를 주도하는 것은 정당이라기보다는 정당 내 여러 캠프들이고, 결국 정부가 되는 것도 승자가 된 특정 캠프의 인적 집단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열린우리당 정부나 한나라당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로 호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집권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 캠프정부가 선거과정에서 공약했던 정책대안을 실현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동시에 임기를 마친 정부의 권력 행사와 정부 운영 결과를 누가 책임지는가의 문제도 모호해진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이번 대선에서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까?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바뀌었고, 당 지도부와 후보는 현 대통령에 대해 자신의 당 출신 대통령이 아닌 듯이 말한다. 그것은 새누리당만의 현상이 아니라 5년 전 민주당의 경우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임 정부에 대한 “회고적 평가”를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당의 연속성이 감춰진 속에서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는 계속해서 애매한 문제가 되고 있다. 


당정관계의 문제도 크다. 캠프정부에서는 자신의 인적 집단을 공직에 충원해야할 필요와 압력 때문에 당정분리를 지향한다.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은 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청와대를 만들고 당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기 때문에, 기존의 당 리더십을 해체하고 당의 역학관계를 과격하게 재편성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러한 변화가 당을 허약하고 왜소하게 만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 후의 정당은 그 이전의 야당 때보다 오히려 허약해지고 지리멸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향을 보였다. 당정 간의 정책조율과 원활한 소통의 필요성은 청와대가 아니라 주로 집권당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대통령의 소극성 때문에 실제로는 잘 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당정관계는 대통령이 압도적 우위에 있는 현실적 권력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또는 최고 권력을 향유하는 대통령의 자만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한때는 견제되지 않는 강력한 대통령 권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자신의 정당으로부터 전혀 구속됨이 없이 당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으로 인해 제왕적 이미지는 더 강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당의 기반이 약한 대통령이 갖는 패러독스는, 제왕적이라 할 만큼 강력한 대통령에서 터무니없이 허약한 대통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정당과 거리를 둔다는 말은, 넓은 시민사회와의 소통은 그만두고라도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괴리되고,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통령들은 임기 중반도 안 돼서 갑자기 사회로부터 고립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다. 임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정당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거리를 두었다. 임기 전반에 대통령은 “집권당 없는 대통령”이고자 여러 형태로 당의 영향력을 제어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에 이르러 그의 권력이 현저하게 약화될 때의 당정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당이 오히려 멀어지고자 한다. 대통령은 대선에 가까워오면서 오히려 당에 부담이 되고, 이제 당이 나서서 “대통령 없는 집권당”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이러한 청와대-집권당 관계는 대통령을 유능하고 좋게 만드는 데 있어서나, 정당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나 실패하게 된 원천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정당이 중심이 되는 책임 정부를 실천하기 위해 차기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이 정부를 구성할 때부터 정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수용하는 책임 내각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국무총리와 내각 인사를 당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하거나 집권당의 주도권 속에서 선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할 때 당정협의는 단순히 당정 간에 의사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의 구성과 운영을 담보하는 기본 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을 대표하는 내각은, 특정 정책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면서 선거 공약을 이행할 정책 수행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대통령과 더불어 당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정당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정당은 정부를 운영할 능력을 갖춘 리더십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장(場)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일반 당원의 참여를 확장하고 신규 당원을 늘리면서 지역적·계층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고, 수많은 정당 활동가들로 하여금 공익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함과 동시에 그들이 정치경력을 일궈갈 수 있는 직업 훈련의 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의 정당 발전은 ‘대표’ 개념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그동안 정당들은 여성, 노동, 청년, 시민운동 대표를 개별적으로 배려하는, 일종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대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대표를 뽑았다는 것과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당의 기반 강화는 특정의 사회계층이나 집단, 직업, 기능적 분야에 있어 이들 사회집단을 실제로 연계할 때 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당이 바로 설 때 당 밖의 관료나 정치지망생들 역시 이쪽저쪽 눈치 보며 신념을 저버린 줄서기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정당 안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과업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연쇄적으로 전개된다면, 대통령은 쇼윈도식의 메가 프로젝트를 졸속적으로 추진할 필요도 없고, 임기 말에 이르러 자신의 정당으로부터 버림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당 간의 경쟁 역시 상대를 상처주고 모욕주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것에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정책대안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제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대선 후보 가운데 정당을 바로세우는 것을 통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 대통령 개인의 사인화된 정부가 아니라 정당의 정부를 만드는 일은, 오늘의 한국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민주적 리더십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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