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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다. 눈썹이라도 태울 것처럼 훅훅 볶아대는 한낮. 땀이 빠져나간 뒤의 서늘한 상쾌함을 알기에 뙤약볕쯤이야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금정산의 산성마을로 가는 길. 익숙한 풍경이다 싶어 기억을 뒤적이니 고등학교 마지막 소풍 왔던 곳이 아닌가. 사춘기의 우울한 심사와 대학입시에 짓눌려 옆으로 눈길 한번 주지 못했던 시절. 꺼먼 교복으로 회상되는 시절이라고 그때의 풍경조차 우중충한 건 아니었다. 오늘을 짐작하고 어깨 높이의 나무를 내 나무로 지정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보잘것없는 나의 생이 그 나무를 축으로 조금은 정갈하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만약 그런 지혜를 바탕으로 그 나무 그늘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두 발을 지녔다고 깝죽대며 돌아다녀보았자, 결국은 자네 밑이로군!

그림ⓒ이해복

부질없다. 금정산 중턱에 오늘 보아야 할 꽃이 있었지만 내 눈에 더욱 들어오는 건 큰까치수염이다. 한 달 전 여행길에서 만났던 것과 아주 비슷한 꽃이다. 벌써 기억이 마구 헝클어지지만 그때 나는 연암의 뒤를 좇아가는 길 위에 있었다. 아주 압축된 여정이라 연암의 자취를 확인하는 건 난망한 일이었다.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지점에 가면 그 자리는 이미 허물어지고 흔적조차 없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준비한 동작은 내게도 있었다. 발밑만 쫓으며 앙앙불락할 게 아니라 고개만 들면 나타나는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당대의 문명이 까불어도 하늘에 부스러기 하나라도 건설할 수 없는 노릇이다. 흑백 사진 하나 남은 게 없는 과거라고 그때의 풍경이 거무튀튀한 건 아니다. 매연도 미세먼지도 하나 없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깨끗한 총천연색의 세계였을 것이다. 차라리 연암의 시선이 뚜렷하게 박힌 하늘을 보면서 그때 그 심중을 헤아려보는 것!

비슷했다. 요동벌판에서 본 까치수염과 금정산의 큰까치수염. 그래도 차이는 있다. 전자가 줄기에 털이 빽빽한데 후자는 전신이 매끈하다. 꽃들이 드문 시기에 울울하게 피어나 허전한 눈길을 달래주는 큰까치수염의 잎겨드랑이마다 붉은 점이 묻어 있다. 오늘은 또 무슨 생각을 발굴하라고 이 혈흔 같은 무늬를 부산에서 내게 주는가. 큰까치수염. 앵초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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