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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를 넘긴 퇴근길.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밥 있어?” “당연히 없지.” “그럼 뭐 먹어?” “밥해서 곰탕하고 먹어.” “밥 없다며?” “쌀은 있어.” 이 무슨 생뚱맞은 대화인가 싶을 분들을 위해 구차한 설명을 좀 해야겠다. 나는 퇴근이 늦었고 남편은 이날 한 달에 두어 차례 돌아오는 야근 당번이었다. 야근을 하면 새벽 3~4시에 퇴근해 하루를 쉬는데 남편은 보통 점심때쯤 일어나 그날의 첫 끼를 먹는다. 평소 아침은 선식으로 해결하고 주말 외엔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이 없는지라 평일엔 집에 밥이 없다. 물론 쌀은 있다. 그러니 남편의 말은 ‘내일 먹을 밥 좀 해놓으라’는 것이고, 내 답은 ‘피곤해 죽겠는데 지금 밥을 하라고?’하는 되물음이었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별도 달도 따 줄 기세이던 시절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어느 누구든 그렇듯 이 로맨틱한 감정 상태와 관계는 영구적이지도, 영속적이지도 않다. 퇴근 후 샤워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달콤한 수박을 함께 맛보는 부부의 안온한 일상. 광고 같은 이 한 장면의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 누군가는 냄새나기 전에 수박 껍질을 조각조각 잘라 치워야 하고 화장실 하수구가 막히지 않도록 수시로 머리카락이며 구석에 낀 물때를 닦아내야 한다. 땀으로 젖은 옷가지를 방치했다간 눅눅한 날씨에 곰팡이 피기 십상이다.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 해도 해도 표시나지 않는, 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성가신 결과가 초래되고 마는 블랙홀 같은 ‘가사노동’이 전제되어야 유지되는 일상이다.

대다수 가정에서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이다. 한국 남성들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40분으로 OECD 최하위인 반면 여성들은 퇴근 후에도 3시간 넘게 허덕거려야 한다. 엄마, 며느리라는 지위에 부여되는 의무는 사실상 ‘독박’ 수준에 가깝다. 가사노동 불균형 고착화의 상당부분은 모성애를 담보로 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이러니 누가 결혼을 하려 하며 아이를 낳고 싶어 할까.

20대 초·중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심취해 있던 나와 내 친구들은 막연한 착각을 했었다. 우리의 결혼생활에 함께할 남자는 당연히 제 손으로 집안일을 해내고 냉장고의 재료로 간단한 끼니는 뚝딱 차려낼 수 있을 거라고. 닭고기를 오븐에 굽고 연어통조림과 미역, 버섯을 손질해 필라프를 만들어 낼 정도는 아니더라도 휴일 오전 커피를 내리고 간단한 샐러드를 만들어 나를 깨워줄 그런 사람일 거라고. 물론 우리들은 일찌감치 깨달았다. 하루키가 그린 초자연적인 세계가 판타지가 아니라 한국의 결혼제도하에서 ‘하루키형 남자’가 실존하리라 희망을 갖는 것이 판타지임을 말이다. 얼마 전 발표된 그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면서도 그가 만들어내는 ‘날조된 일상’에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따지고 보면 하루키형 남자들은 이유식을 만들지도, 젖병을 삶지도, 중 2병 아이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지도, 처가나 일가친척의 대소사에 간여하지도 않는다.

얼마 전 한 남자 후배가 페이스북에 올린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는 제목의 시 한 편에 ‘웃펐던’ 기억이 난다.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고 읊조리는, 40대 초반 남자가 시적 화자로 추정되는 시다. 그저 긴 노동시간에 지친 이들과 ‘저녁이 있는 삶’을 나누고픈 순수한 의도였지만(보증하건데 이 후배는 높은 성평등 의식을 가진, 이상적인 남편감이다) 댓글엔 ‘그럼 밥은 자기가 안 하는가 보다’며 여자 후배들의 농담 섞인 비판이 쏟아졌다.

사람답게 먹고 입는 평범한 일상. 누구나 꿈꾸는 저녁이 있는 삶. 하지만 가사노동 없이는 구현되지 않는 판타지의 세계다.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가사노동은 생래적으로 받는 서비스가 아니다. 최소한의 앞가림이다.

문화부 |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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