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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기는 특별하다”는 한때 텔레비전 광고에서 자주 들었던 카피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의 모든 아기 엄마들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확실하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다. 엄마들은 누구나 “내 아기가 천재가 아닐까” 뜨겁게 고민하는 시기를 보낸다. 엄마의 눈에는 아기의 모든 것이 특별해 보인다. 아기의 특별함이 아니라 엄마가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즘이 아기에게 투사된 감정이라는 사실은 잘 인식되지 않는다.

아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후에도 아기에게 투사된 엄마의 나르시시즘은 포기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다양한 조기 교육을 하고, 수많은 학원을 돌게 하고, 조기 유학을 보내기도 한다. 특별한 재능이 보인다 싶으면 그 분야의 대가에게 데리고 가서 검증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자녀의 욕구는 고려되지 않는다. 자식이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특별한 사람의 부모가 되고 싶어 하는 엄마의 욕구만이 빛날 뿐이다. 자녀의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통제하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의 친구, 대학, 학과 등을 자신이 결정한다. 물론 자녀의 배우자도 직접 검증한다.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이 자기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이해하지 않는다.

뜻대로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놓은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제 보상을 요구한다.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부모에게 용돈도 주고, 매일 안부 전화도 하고, 부모가 원할 때면 언제나 시간을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에게 직장과 가정의 모든 과정이 장애물 경주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을 공감할 줄 모른다. 왜 안부 전화를 빠뜨렸느냐고, 왜 생일을 잊었느냐고 자녀를 채근하고, 자녀들은 어린 시절 습관처럼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 애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르시시즘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은 1970년대 미국에서부터 이야기되어 왔다. 20년쯤 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나르시시즘은 한 개인이 자신이 옳고 선하고 정당하고 특별하다고 믿는 감정이다. 나르시시즘에도 건강한 수준과 병리적 수준이 있다. 건강한 나르시시스트들은 자기를 존중하는 만큼 타인을 존중하며, 자기의 의견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의견에도 귀 기울일 줄 안다. 자신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를 조절해 두 사람 모두에게 이상적인 결론을 찾아낼 줄 안다.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들은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세상에서 무수히 목격되는 논쟁 장면들은 자기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의 대결이다. 저마다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목숨처럼 사수하면서 타인의 그름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쏟기 때문에 모든 논쟁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타인을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타인의 성취를 깎아내리며 폄하할 때도 옳다는 신념에 가득 차 있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여기는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숭배하며 특별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상한 점은 병리적 나르시시스트의 미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행동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혹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행동이 간혹 터무니없고 비상식적인 경우에도 대중들은 그것을 성공한 사람의 특권으로 여기며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을 선망하고 숭배하면서 그들을 모방한다. 대중들의 마음을 읽은 자본주의는 나르시시즘을 훌륭한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다. 시장에 범람하는 나르시시즘의 코드는 다시 대중들을 휩쓸어 가는 기호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특별함을 주장하면서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가족, 친구, 동료,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 자신만이 옳고 특별하다는 ‘병적 나르시시스트’가 힘을 가질 때
부모는 자녀에게, 리더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나쁜 영향을 끼쳐
일방적 헌신과 희생 요구하는 ‘그’에게 단호한 거절이 필요


문제는 정서적·도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나르시시스트들이 힘을 가졌을 때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리더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자기 가치만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랫사람들을 키워줄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을 사용한다. 타인을 착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성공이나 특별함의 증거라 믿는다. 자신의 잘못이나 약점이 드러났을 때는 겸허하게 인정하기보다는 끝까지 부정하는 쪽을 택한다. 그들에게 겸손함이란 약자가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의 심리적 뿌리는 유아적 전능감이다. 유아기에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이 옳고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느끼는 아기의 감정이 현실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유지되면서 성인 나르시시스트를 만들어낸다. 또한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양육되면서 동일한 감정을 물려받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이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 채 내면에 숨겨두고 있는 감정은 수치심과 시기심이다.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마음 밑에 있는 감정은 시기심이다. 타인을 폄하하면서까지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우월감은 수치심이거나 열등감이다. 그들은 불편한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현실을 왜곡하는 쪽을 택한다.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나르시시스트와 얽혀 감정적 불편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본인도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한다. 내면에 동일한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고통당하면서도 특별한 사람 곁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우월하다는 자기 이미지와 특별한 대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토록 우월하고 선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으며, 그런 점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삶이 오히려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자신을 조종하려는 나르시시스트와 경계를 그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다른 욕구, 감정, 생각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한 상태에서 나르시시스트의 요구에 단호하게 거절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경계를 잘 유지할수록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면 좋을 것이다. 거절당한 상대방이 격렬한 분노를 표출할 때 그것을 묵묵히 감수할 준비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윈윈하는 관계 맺기를 배워야 한다. 일방적인 헌신이나 희생을 요구하는 상대에게 그 대가가 무엇이냐고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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