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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이 시작되는 첫해에 나는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었다. 오클랜드의 큰 서점에 들어가 베스트셀러 1위 코너에서 집어든 책은 세라 도너티의 <황야 속으로(Into the Wilderness)>라는 소설이었다. 1998년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두 해 이상 영어권에서 두루 읽히는 중인 듯했다. 소설은 한 가족의 일상을 묘사하는 밝은 분위기로 시작된다. 대학에 진학하여 큰 도시로 유학을 떠나는 딸의 짐 싸기를 돕는 부부 모습이 한동안 묘사된다. 부부는 딸이 대학 생활에서 누릴 즐거운 활동들에 대해 조언한다. 딸을 배웅한 후 자동차가 막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편이 운전 중인 아내에게 차를 잠깐 세우라고 청한다.

“우리 이혼합시다.”

남편은 딸이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기다려왔다고 말한다. 짐을 꾸려놓으면 사람을 시켜 가져가겠다고 덧붙인 후 그 길로 차에서 내려 멀어진다. 그 대목은 우선 소설적 반전 때문에 놀라웠다. 더 놀랐던 점은 문화 차이였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도 이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혼은 아내 쪽에서 제기되었다.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이혼을 요청하는 쪽도 아내였다. 우리 사정과 정반대인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머잖아 우리나라에서도 남편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

이혼이 증가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나와 있다. 핵가족 사회의 양육 환경이 개인을 정서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어 친밀한 관계를 어렵게 한다는 견해가 있다(앤서니 기든스). 귀한 자식으로 키워져 나르시시스트가 된 개인들이 결혼 제도 안에 포함된 헌신과 배려 행위에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크리스토퍼 래시). 페미니즘의 등장과 여성들의 변화가 결혼 제도를 흔드는 근간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이들은 남녀가 본래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함께 사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닐까 의문을 제기한다. 그중에서도 친밀한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파는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 아닐까 싶다.

한 여성은 남자친구와의 연애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이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연애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는 개 아니면 애”라는 항간의 속설을 수용하고, 남자친구가 자기에게 원하는 것을 ‘개의 영역과 애의 영역’으로 나누어 인식해 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남자친구의 마음과 행동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관계의 갈등이 줄어들고 파도는 잦아들었지만 허전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낭만적 환상이 제거된 연애의 정의가 너무 야박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연애란 건강한 성인 남녀가 자발적으로 만나 성적 정서적 친밀감을 나누는 일” 말고,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결혼 연령이 늦춰지는 이유가 오직 경제적인 요인뿐일까
젊은이들은 계약 결혼 등 구속력과 책임이 덜한 대안을 꿈꾼다
그럼에도 연애와 결혼은 미화되고 꾸준히 팔릴 것이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웩슬러가 남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당신은 왜 섹스를 하는가. 그 대답은 여러 가지였다. 자긍심을 확인하기 위해, 분노를 숨기기 위해, 우울 불안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못한 일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 동정심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배우자가 원하는 친밀감에 부응하기 위해, 아내가 원해서 등등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애정을 표현하고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이 섹스하는 이유 중에 “애인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섹스한다”는 답은 없다고 덧붙이면 모든 여성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것은 공정한 관계 맺기이다. 남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신체적 욕구가 먼저 있어서 그것을 잘 충족시켜줄 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의존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가 먼저 있어서 그것을 잘 충족시켜줄 남자를 사랑한다. “여러분도 애인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가방을 선물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돌직구에 화를 내는 여성도 있다.

결혼 생활에서도 딜레마는 이어진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원가족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자립할 자신은 없어 결혼을 선택한다. 그들은 결혼을 하기만 하면 행복한 가정이 절로 생기고 남편의 사랑과 헌신을 받을 거라 꿈꾼다. 남편에게 독점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여성은 이런 질문을 한다. “시어머니에게서 남편을 빼내와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들에게 환상이 제거된 결혼의 정의를 말해준다.

“결혼이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 남녀가 만나 가족 공동체를 꾸리는 일이다. 두 사람은 공동체를 공동 운영하는 협력자 지지자가 되며, 그들만의 정서적 성적 친밀감을 나눈다. 자녀가 출생하면 양육과 교육을 책임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운영되는 데 필요한 노동력, 경제력을 합의된 방식으로 제공한다.”

낭만적 환상의 요소가 배제된 연애와 결혼의 본질을 말해주면 젊은 여성들은 실망하거나 화를 낸다. 어떤 여성은 모욕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하지만 환상을 깨뜨리면서 지금 화를 내는 게 나을 것이다. 나중에 자기 환상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고 연인이나 남편에게 화를 내며 관계를 깨뜨리기보다는.

15년 전쯤에 외국 소설을 읽으며 염려했던 일이 아직 우리 사회에 나타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날로 어려워진다는 것은 모든 성인들이 체감하는 진실이다. 체면을 중시하고, 이혼을 실패로 여기는 중년 남자들은 묵묵히 어려움을 감수한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젊은 남자들은 결혼을 미룬다. 갈수록 결혼 연령이 늦추어지는 이유가 오직 경제적인 요인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처럼 “단칸방에서 숟가락 두 개만으로 시작했던” 그 용기와 신뢰를 나눌 만한 관계 맺기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계약 결혼, 파트타임 결혼 등 구속력과 책임이 덜한 대안을 꿈꾼다. 정부와 미디어가 아무리 결혼을 미화하고 출산과 육아를 멋진 일로 포장해도 젊은이들은 이미 그 의도까지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애와 결혼은 포장되고, 선전되고, 꾸준히 팔리는 상품이 될 것이다. 젊은 여자들은 낭만적 환상을 좇아서, 젊은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 일을 할 것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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