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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는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음주기로 꼽힌다. 두 책을 읽으면 ‘낭만적 음주’의 절정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문주반생기>의 자존자대, 곧 허풍은 도리어 얼마나 진솔한가.

두 사람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뒷날 행로는 아주 달랐다. 변영로는 시인으로 언론인으로 살았지만, 양주동은 국어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국어학자 양주동은 여러 저작을 남겼지만 향가를 연구한 <고가연구>를 제외하면 모두 자장귀 같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야망이 오로지 ‘불후의 문장’에 있었고, 시인·비평가·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던” 양주동이 국어학자가 된 것은 일본인 학자 오쿠라 신페이 때문이다. 향가는 알다시피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이 귀중한 신라의 노래는 향찰로 쓰여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한다. 최초로 향가를 연구한 사람은 일본의 학자 오쿠라 신페이였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오쿠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는 양주동의 민족의식을 격발시켰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첫째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 더구나 우리 문화 내지 사상의 현존 최고 원류가 되는 이 귀중한 향가의 석독을 근천년래 아무도 우리의 손으로 시험치 못하고 외인의 손을 빌렸다는 그 민족적 부끄러움, 둘째 나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한 민족이 ‘다만 총·칼에 의해서만 망하는 것이 아님’을 문득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아, 내가 혁명가가 못되어 총·칼을 들고 저들에게 대들지는 못하나마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자에는 약간의 ‘천분’이 있고 맘속 깊이 ‘원’도 ‘열’도 있는 터이니, 그것을 무기로 하여 그 빼앗긴 문화유산을 학문적으로나마 결사적으로 전취·탈환해야 하겠다는, 내 딴에 사뭇 비장한 발원과 결의를 했다.”

무리한 공부로 폐렴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완성한 <고가연구>는 민족적 자존심을 살려준 것은 물론이고, 향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폭발시킨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고문헌을 독파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책의 서두에는 방대한 문헌이 열거되어 있다. 이 책들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고서들이었다. 곧 원본밖에 없는 책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 누가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양주동은 결심이 서자 ‘한글 고문헌 장서가’인 방종현·최남선·이희승·이병기 등을 방문하여 문헌을 빌렸다. 또 그들은 ‘국보급 장서들’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아마 방종현 등의 ‘한글 고문헌 장서가’가 없었다면, <고가연구>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방종현과 최남선·이희승·이병기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었다. 책이 흔하지 않고 연구에 필요한 책은 더더욱 귀하였으니, 학자들은 책을 모으는 데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이름난 학자는 거개 장서가이기도 하였다. 지금 모모한 대학 도서관에 ‘동빈문고’ ‘가람문고’처럼 ‘문고’가 들어간 장서들은 모두 학자 개인들이 처절한 노력을 통해 모은 것이다. 하지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책을 모으는 분위기는 거의 찾기 어렵다. 어지간한 자료는 온라인으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테크놀로지가 연구 환경을 바꾸고, 연구 풍토까지 바꾼 것이다.

예전에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도 고서가 꽤나 있었다. 1978년도의 기억이다. 한 고서점의 시렁 위를 보니, 고서가 잔뜩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책은 <좌전>이다. 손때가 거의 묻지 않은 책 한 질이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읽을 수 없는 책이지만, 살 수 없는 책이지만, 값은 물어볼 수 있었다. 한 권당 1000원이란다. 대학생이 가정교사로 나서면 한 달에 4만원 정도 받는 시절이었으니, 책값은 그리 비싸다고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집안이 넉넉한 처지였으면 그 책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연구자가 되고 나서도 나는 고서점은 출입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고서점에 가보면 한 권당 20만~30만원이 훅 넘는다. 연구에 꼭 필요한 거라면, 어떻게든 마련하겠지만, 그런 자료들은 이미 영인본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 굳이 고서를 사 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고서를 사 모을 만한 나이, 즉 30~40대에 너무 주머니가 얇아서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가까운 친구 중에 고서를 사들이는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 친구를 만났더니 아무개의 문집이 낙질본과 17세기 유명한 문인의 간찰이 있는데, 자네 가지고 가려는가? 한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친구의 마음도 고마워서 받아들고 왔다. 그 간찰의 주인공의 문집은 이미 영인본이 나와 있어 내용은 굳이 탐낼 것도 없지만 말이다.

고서를 열심히 모으는 분을 만나면, 은근히 책 자랑을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희귀본을 어떻게 구입했다는 것, 뜻밖에도 염가에 구입했다는 것 등등이다. 하지만 부러워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책들은 대개 이미 영인본이 있다. 굳이 원본으로 구입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부러운 경우도 있다. 고서점 출입을 자주 하다 보면, 희귀한 자료를 손에 넣을 확률이 높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모모한 분들은 그렇게 해서 구입한 자료를 학회에 가서 소개하고 논문도 쓰고 번역도 하여 책을 내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얻기 위해 고서점을 출입할 마음은 없다. 또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여전히 없다. 이미 나와 있는 책만으로도 내 공부는 충분한 셈이다. 이러니 나는 앞으로 대학 도서관에 내 이름을 딴 문고를 설치할 자격은 아예 없는 셈이다. 하하!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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