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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제2의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야생 영장류를 연구했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열대 우림이다. 이 나라의 도시, 특히 수도는 너무 복잡하고 정신없어서 정이 가지 않지만 인적이 드문 시골로 들어서기 시작하면 마음이 활짝 펴진다. 맑은 물, 시원한 공기, 순진무구한 사람들. 단순하고 소박한 삶들이 늘어선 좁은 길을 따라 숲을 향해 나아가면, 수년 전 야생동물 그리고 고독과 씨름하며 지내던 날들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밀림. 그곳이 나는 늘 그립다.

얼마 전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랜만에 조우한 현지 연구보조원과 얼싸안으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숲속으로 들어가 긴팔원숭이 가족을 찾아 안부를 묻기도 했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그곳에 여전히 잘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저 고맙고 감개무량하다. 나무도, 개울도 여전히 푸르고 언제나처럼 넘실거렸다. 열대우림의 품 안에만 안겨 있으면 모든 게 평온하고 영속될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아직은 괜찮은 건가, 어느새 마음을 툭 내려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이곳에도 나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기름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팜유 지대이다. 이곳에서 내가 영장류 연구를 시작하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없었는데, 짧은 기간에 엄청난 규모의 팜유 농장이 국립공원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팜유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식물성 유지로 세계 최대의 생산국이 바로 인도네시아이다. 예전에 인도네시아는 팜유를 소량 생산해 왔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해 1990년대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며 현재 약 2000만t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팜유는 과자, 아이스크림, 초콜릿, 라면 등 각종 식품은 물론 세제, 비누, 화장품 그리고 바이오연료에까지 쓰이는 범용성 원료이다. 다른 말로 하면, 슈퍼에서 장을 볼 때 팜유를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물론 우리나라도 주요 팜유 수입국으로 팜유 농장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궁금하다면 위에 열거된 품목에 해당하는 물건 아무거나 들어 뒷면을 살펴보라. 야자유, 야자경화유 등도 모두 팜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팜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이쯤 말하고 나면 눈치챘을 것이다. 어두운, 몹시 어두운 이면이 있다는 얘기가 나올 차례지 않은가. 물론이다. 문제는 팜유가 오늘날 동남아시아 산림 파괴와 야생동물 멸종의 가장 심각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팜유 농장은 경작지를 활용해 조성하지 않는다. 바로 열대우림의 세계를 침범해 전부 베고 불태운 전쟁터 같은 땅 위에 세워진 것이 팜유 농장이다. 인도네시아 팜유가 세계 공급량의 절반을 넘어서고, 말레이시아를 제치며 1위 생산국 자리를 탈환한 2000~2009년에는 약 34만㏊가 팜유에 할애됐다. 이 중 대부분은 저지대 산림이었다. 이때에만 서울 면적 5배가 넘는 숲이 사라진 셈이다. 그리고 이 참혹한 현상은 이 순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값싼 기름 때문에 죽어나가는 생물들과 생태계를 일일이 열거하기란 불가능하다. 팜유의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는 다름 아닌 오랑우탄이다. 잿더미의 숲 한중간에서 어쩔 줄 모른 채 고립된 오랑우탄의 모습은 이제 잘 알려진 팜유의 반대급부 이미지다. 서식지 파괴와 밀렵으로 그 개체수가 90% 이상 사라진 오랑우탄은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열대우림에서 그저 한 종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아직 못다 한 여러 종의 생물 그리고 그들 간의 복잡·미묘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은하계를 수놓을 만큼 많고 광대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멸종과 파괴에 대한 뉴스를 경제활동의 필수불가결한 부산물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이런 비극적인 정보의 나열이 조금이라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국제사회는 늦게나마 산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기름을 생산하는 지속가능 팜유를 확대하고자 ‘지속가능한 팜유 라운드 테이블(RSPO)’이라는 기관을 설립해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다. 팜유는 물론 이 제도가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아무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7월29일 국내 화장품 원료 분야에서는 첫 번째로 생활화학전문기업 KCI가 RSPO 인증을 받았다. 좋은 출발이긴 하나, 화장품 수출 3조원 시대를 연 나라로서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행보이다. 인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나머지 팜유 사용 업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의 속내는 한 가지다. 소비자들이 관심 없는데 뭘? 관심이 없었다면 당장 지금이라도 있게 하자고, 야생학교는 촉구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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