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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대학교에서 직업·적성 관련 특강을 했다. 담당자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마련한 특강이라며, 내가 문제의식을 느낀 사회·문화 현상, 그와 관련해 벌인 작업, 그러면서도 어떻게 이제까지 안 굶어죽고 살아 있는지에 대한 경험담을 들려주기를 바랐다. 특강을 하기로 한 뒤 서류를 주고받았는데, 내 서류를 받아 본 담당자는 학력사항 기재를 요구했다. 나는 조금 의아했다. 삶의 경험을 나누는 특강을 이전에도 한 적 있지만, 학력사항 기재를 요구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담당자는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시행되는 사업이기에 정부가 요구한 서류의 형식과 내용이 존재하고, 학력사항 역시 이에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강연비 책정 기준이라고!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만약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수십년 동안 식당을 운영해 온 요리 장인이 직업 특강을 한다면? 학력을 이유로 다른 특강 인사보다 낮은 강연비를 받는다면 부당한 일 아닌가? 수십년간 삶의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몇년간 대학에서 쌓은 경험보다 가치가 떨어지는가?

나는 대학이라는 공간이 학위 시스템을 중요한 축으로 삼는 기관임을 이해한다. 조금 더 시니컬하게 말하면 학위 증명을 통해 돈을 벌고, 배출된 인물들의 실적을 통해 대학의 권위를 공고히 다져 ‘높은 값’을 유지하며, 이와 같은 시스템이 가급적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라는 공간이라고 인지한다. 이런 맥락에서 대학이 누군가에게 ‘정규 수업’을 맡길 때 그곳의 질서를 따르도록 하며 학위 증명을 요구하는 일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적성 특강은 대학교 바깥의 경험을 학생들과 나누기 위해 외부 인사를 일회적으로 불러오는 것. 특강에 섭외된 것부터가 경험의 가치를 인정받은 일이고, 만에 하나 경험의 가치를 차등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기준을 학력으로 삼는 것이 올바른지 의문이었지만 담당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시스템이 문제지…. 행정의 모순을 관계자도 알았는지 그도 내게 말했다. “저도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만 공개적으로는 말 못하는 입장이라…. 서윤씨가 이거 관련해서 칼럼 써주세요.” 그래서 지금 쓰고 있다.

필요한 만큼만 요구하라. 평소 해 온 생각이다. 특히 타인에게 정보를 요구할 때, 필요한 것이 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몽땅 다 요구하고 수집하다 보면 폭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걸 왜 물어보시죠?”라는 반문이 절로 나오는 순간들. 예컨대 처음 만난 사람과 친교를 목적으로 만났을 때 나이, 출신 학교, 결혼 여부가 ‘가장’ 중요한 정보인가?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취향을 탐색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 아닐까? 또한 상대가 감정을 가진 인간이고, 정보 역시 개인의 재산임을 인지한다면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적 정보를 스스로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주 접한다. 너무 많은 정보를 당연한 듯 요구해서다. 예컨대,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포털사이트에 가입하려면 이름, 휴대폰 번호, 주소, 심지어 주민등록번호까지 몽땅 입력해야 했고, 그것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왕창 털려서 마케팅 자원으로 거래됐다.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은 받지도 못했다. 온라인 사이트가 회원에게 수집하는 정보를 제한하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려나.

수집된 사적 정보가 개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하는 자료로 쓰이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회사에서 일하는 데 업무 경험 내지 업무 적성,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중요하지 본적, 가족관계, 부모 직업, 신체 사이즈, 출신 학교 등을 왜 알려야 하는가? 입사 서류에 과도한 정보를 요구하는 것 역시 ‘필요한 것만을 정확히 요구하는 태도’의 부재라고 느낀다.

제도의 변화로 우리의 의식과 문화도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정부가 예산을 집행하여 벌이는 사업의 행정 절차부터, ‘본질적으로 필요한 정보’만을 수집하고 차별 발생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길 바란다.

<최서윤 아마추어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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