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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성찰’을 잃어버리면 퇴행밖에 없다. 성찰은 ‘더 나아지겠다’는 의지와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찰은 ‘염치’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과거를 ‘객관의 거울’ 속에 넣고 미래의 교훈으로 삼는 일인 까닭이다.

자유한국당이 선거제 개편안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해 국회를 처음 점거한 지난달 25일 그들은 “독재 타도, 헌법 수호”를 구호로 외쳤다. 인간띠를 두르고 국회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자못 비장했다. 아수라장이었던 ‘동물국회’ 내내 그들은 여야 4당의 선거제 합의를 ‘좌파 독재’로 몰아세웠다. 그 내용의 황당함은 물론이거니와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정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정확히 45년 전인 1974년 4월25일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으로 시작되는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터트렸다. ‘10월 유신독재’를 한창 강화하던 때였다. 8명의 무고한 시민들은 1년 뒤인 1975년 4월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시사 2판4판]독재를 찾습니다 _ 성덕환 기자

한국당은 이처럼 과거 ‘독재를 수호(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했으며, ‘헌법을 파괴(10월유신)’했고, ‘국민을 학살(5·18 민주화운동)’한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유린한 과거사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도 않다. 지금도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 “5·18 폭동을 뒤집을 때” 같은 독재의 망령을 공공연히 불러낸다. 그래서 그들의 ‘민주주의 수호’는 늘 위선적으로 들린다. 인혁당 사건이 오랜 옛일이기에 모두 잊었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한국당 해산 청원에 “북한이 하라는 대로 일어나는 일”(나경원 원내대표)이라는 식 대응을 보면 그들이 45년 전 수법을 잊은 것은 아닌 것 같다.

한국당의 ‘좌파 독재 타도’ 구호에 과거 암흑기를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견뎌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 이상이다. 존재의 부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독재는 곧 ‘공포’다. 독재의 시간은 그래서 ‘선연한 피의 흔적’들로 새겨져 있다. 4월만 해도 김세진·이재호 열사, 인혁당 재건위 8인의 흩뿌려진 피의 무늬가 선연하다. 민주주의라는 ‘타는 목마름’(김지하 시인)으로 피의 공포에 맞섰던 이들에겐 한국당의 ‘독재 타도’ 운운은 인간 정신과 용기에 대한 모독으로 들린다. 한국당이 독재의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친일’의 역사를 흐지부지 무마하려는 그들의 오랜 양심(?)의 뿌리도 알 것 같다.

‘좌파 독재 타도’를 주도하는 게, 과거 독재정권의 주구였던 ‘공안’의 피가 흐르는 황교안 대표라는 게 더욱 아이러니하다. ‘검사 황교안’의 정체성은 ‘반독재’였던 모양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인사청문회에서 이병호 국정원장 후보자조차 “법률적으로 학술적으로 쿠데타”라고 했던 5·16 군사정변에 대해 “역사적·정치적으로 다양한 평가가 진행 중”이라며 답변을 피했다.

한국당의 “독재 타도, 헌법 수호”는 소위 ‘프레임’을 다투는 정치전략일 테지만, 그 역시 금도가 있어야 한다. 당장의 작은 정치적 이익을 위한 교묘한 거짓이 궁극적으로는 정치 자체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이든 개혁이든 모든 변화의 근본적 어려움은 구시대에 발 딛고 새 시대를 지향해야 하는 조건에 있다. 그 사회의 기준과 눈은 이미 미래로 맞춰져 있으나, 실현할 기반은 여전히 구시대의 제도와 관행·세력 속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변혁은 그래서 ‘반동’을 만난다. 적폐와 ‘동거’하면서, 적폐를 ‘소거’해야 하는 운명의 가혹함이다.

지금 우리 사회 구시대의 상징은 결국 ‘탄핵(헌법적 실패)’으로 몰락한 제1야당 정치 세력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용기 있는 성찰과 개혁으로 과거와 절연하지 못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오명이다. 패스트트랙 정국 속 그들의 ‘무성찰·몰염치’를 보면 그 오명을 지울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한국당의 몰이성 속에는 “정치란 그런 것”이란 물귀신과도 같은 자기 합리화가 깔려 있다. 정치의 주체이면서도 정치를 ‘비하’하는 의식이다. 정치 혐오야말로 낡고 부패한 정치가 기득권을 유지해온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지금 한국당은 과거와 미래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한 듯하다. 미래·통합의 소명을 향한 새로운 보수정치의 ‘답’을 기대했지만, “나라(정치)가 망해가는지도 모르고 자기들 밥그릇 싸움”만 하는 ‘퇴행의 거처’로 돌아간 것 같다. 그 선택으로 총선 1년을 남기고 지지율 상승의 단맛도 봤으니, 되돌리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버린 그들 선택의 결과를 예단하긴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결과가 ‘후회’에 가까운 것이 될 때 과거 어떤 경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처참한 실패’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치를 대가도 크다.

<김광호 정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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