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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를 아는 것(Knowing X)과 X에 관해 아는 것(Knowing about X)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학 신입생 때 김안중 교수(서울대 교육학과·2009년 작고)의 ‘교육학개론’ 시간에 들었던 질문이다. 김 교수는 대학원 ‘교사론’ 강의에서도 같은 화두를 던졌다. “X를 가르치는 것과 X에 관해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김 교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자신은 지금도 없다. 하지만 이 물음은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몇 해 전 가족과 미국에 1년 연수갈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현지 학교에서 각종 자료와 함께 받아온 과제물은 이랬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중세 시대의 배가 발견됐다. 배를 끌어올렸더니 유럽 왕조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과 지도, 은으로 만든 동전 등이 나왔다. 이 배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이런 물건들이 왜 배 안에 들어 있고,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상상해서 적어보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미국 학교에서는 16~17세기 유럽과 신대륙을 오가던 배를 대서양에서 건져올린 학자가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을 10살짜리에게도 똑같이 경험하게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 같은 탐험가나 당시 유럽 상황 등을 가르치는 일은 후순위였다.

수업 방식도 달랐다. 한번은 아이가 교실에서 하루 종일 지도만 그리다 왔다. 교사가 가로 3m 세로 1m 칠판에 굵은 직선과 원, 삼각형 등을 이곳저곳에 그리면 아이들은 그것을 가로 30㎝ 세로 10㎝ 종이에 그대로 옮겼다. 아이들은 다시 그것을 가로 15㎝ 세로 5㎝ 종이에 그렸다. 한국이라면 시간 낭비라고 학부모들의 항의가 쏟아질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방위와 축척 등 지도의 주요 개념과 수학의 닮은 도형 원리를 몸으로 배웠다. 설령 축척과 닮은비를 몰라도 지도를 그리고 읽을 수 있게 됐다. 김안중 교수 표현을 빌리면 아이들은 ‘지도에 관해서’가 아닌 ‘지도’를 알게 된 것이다. 미국 학생들이 초·중·고교 단계에서는 뒤처지는 것처럼 보여도 대학과 대학원에서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것은 이런 교육과 학습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한국 학생들은 주어진 시간에 남보다 하나라도 더 많은 교과 지식을 머릿속에 채워넣기에 바쁘다. 소설의 3요소(주제·구성·문체)와 소설 구성의 3요소(인물·사건·배경)를 알고, 동서고금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줄줄이 꿰며, 수능에서 2000자 분량의 지문을 1분 만에 독파하지만 정작 장편소설 한 권 읽지 않고 고교 3년을 마치는 학생이 태반이다. 고차방정식과 미적분, 기하·벡터의 최고난도 문제를 초스피드로 풀어내지만 수학의 핵심인 자연과 일상의 규칙성을 수와 연결시키는 능력은 떨어진다.

한국 학생들이 역사를 암기 과목으로 여기는 것도 난센스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많이 안다고 역사를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열강의 한반도 침탈과 해방 직후 분단 과정에 관한 지식을 쌓는 것은 현재의 남북 상황과 한·미, 한·중, 한·일 관계를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역사 교육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

다시 김안중 교수 질문으로 가보자. 수학에 관해 아는 것과 수학을 아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문학에 관해 가르치는 것과 문학을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X에 관한 지식을 쌓다보면 X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있고 X를 연구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데는 단기간에 다량의 지식을 주입한 교육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등장으로 ‘X에 관한 교육’은 의미를 상실했다. 사회의 생산력 향상,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은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새학기부터 초·중·고교 교과서가 학생 참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초등 3학년부터 고등 3학년까지 10년간 국어 시간에는 ‘한 학기 한 권 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학생들은 학기마다 책 한 권을 선정해 읽고 토의한 뒤 결과를 글로 표현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교육부는 “‘읽기’가 아닌 ‘읽기에 관해’ 공부하고, ‘쓰기’가 아닌 ‘쓰기에 관해’ 공부했던 것에서 벗어나 실제 ‘읽기’와 ‘쓰기’를 수업 시간에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 시간에는 자신이 사는 마을의 지도를 만들고 뉴스를 제작하는 활동을 넣었다고 한다. ‘X에 관해’ 가르치지 않고 ‘X’를 가르치겠다는 의미다. 교육부의 이번 시도가 열매를 맺고 널리 퍼져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오창민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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